환기미술관 다녀왔습니다.
2024년, 대규모 미술관 리노베이션을 진행하고 다시 새로운 모습으로 전시를 연 것인데요.
저는 2021년에 처음 환기미술관에 가보고 이번이 두 번째 방문입니다.
그림 말고, 그때와 무엇이 달라졌는지 잘 모르겠는 이 뜨문뜨문한 관람객은 오랜만의 방문이 그저 설레고 좋았습니다.
A4 사이즈만 한 크로스가방은 보관함에 맡겨두고 가벼운 몸으로 전시 본관에 입장했습니다.
내부 작품 사진촬영이 모두 금지되어 있어 관람에 앞서 괜히 아쉬운 마음이 드는데.
보고 있는 동안에도, 보고 난 뒤에도 사진촬영 없이도 충분히 좋았다고 느껴집니다.
미술관 오픈 시간이 10시인데, 오픈런을 하자! 지난주부터 마음먹었지만 주말 늑장을 부렸더니 10시 반쯤 도착했습니다.
다행히 아직 그 시간은 한산한 편이어서 그림을 여유롭게 볼 수 있었고, 그림 수가 많아 눈을 부지런하게 움직였습니다.
그림을 천천히 보다 이번에도 다다른 맨 위의 공간.
지난번 경험으로 아는 '주인공 등장 신'을 보러 가는 기분. 또 얼마나 대단한 것이 있을까 싶어 가슴이 콩콩, 기대가 피어오릅니다.
천천히 계단을 올라 양 날개가 펼쳐지듯 환한 공간에 들어서니 역시나 그의 대작들이 걸려 있습니다.
눈은 두 개지만 몸은 하나라 모든 것을 동시에 바라볼 수 없으니 마음이 가는 오른쪽으로 먼저 시선을 돌렸습니다.
조용한 전시장에서 3미터 가까이 되는 그림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하나하나 손으로 만든 수많은 점점점...을 눈으로 담다 가슴이 벅차다 못해 눈물이 차올랐습니다. 눈물이 또르르 흐르지 않도록 꾹 참았습니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얼마나 외로웠을까... 헤아리게 되는 크기.
눈물과 함께 나온 콧물을 훌쩍였습니다.
전시장에서는 유난히 콧물 훔치는 소리가 크게 들려 멋쩍어지고, 전시장이 너무 환해서 조금은 부끄러워지는 이 기분을 감추고 오래오래 그림을 보았습니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연작 그림을 보면 그게 꼭 하나하나 눈물방울 같았습니다.
고국을 생각하며 캔버스에 놓은 마음들. 그리움에 콕, 외로움에 콕. 그렇게 콕콕콕 찍었을 점화에 마음이 숙연해집니다.
언제는 그 모습이 빗방울이었다가 오늘은 눈물방울로 보이는.
정답 없는, 어느 날마다 달라질 그림 감상.
오래 보아도 질리지 않는 그림을 계속 보다가, 이제는 내려가야지 싶어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또 다르게 인상 깊었던 것은 힘을 뺀 드로잉들.
손바닥 크기의 종이에 그가 스케치한 나무들.
그저 눈앞에 있는 것을 그린 듯한 그림.
그것은 소위, 나도 이 정도는... 하며 쉽게 볼 수 있는 그림.
그러나 마냥 흘려볼 수 없는 그림.
애정이고 훈련이었을 것 같은 그림.
제게도 그런, 연습장이라 부를 만한 종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앞에서 늘 망설이게 되는 이유는, 나에 앞서 잘하는 것들만 봤기 때문인가.
나풀나풀 이면지도 아니고, 고이 만든 한 권의 노트 위에는 이 정도는 돼야 하지 않나 하는 이상한 기준과 기대 때문에 시작도 못 합니다.
빈 노트는 그렇게 계속 쌓여만 갑니다.
언제고 다음에, 다음에로 미룰 수 없다는 생각에 손바닥만 한 스케치북을 한 권 꺼냈습니다.
앞장을 펼치고, 일기 같은 글을 끄적였습니다.
힘을 줄 필요 없이 스케치북의 시작은 이렇게나 쉬웠던 것인데.
스케치북에 그림도 있고 글도 있고, 거기에 영수증도 끼워져 있고 그럴 수도 있는 거지.
괜찮다고 썼습니다.
그러다 스케치북에 있는 작은 모눈을 보니 어제 내가 본 점화가 생각나 필통에 있는 색연필로나마 그것을 따라 해 보기로 했습니다.
작은 종이를 채우는데도 손이 아프고, 고개 숙이고 색칠하려니 목도 아팠습니다.
이러한데 그 큰 그림을 어떻게 채웠을까...
반복에 반복, 수행을 닮은 그의 그림을 계속 떠올렸습니다.
손바닥만 한 내 앞의 스케치북. 이렇게 채운 종이 한 장.
작고 작은 작업임에도 다 해놓고 나서는 뿌듯했습니다.
내가 영향받는 것은 나에 앞선 다른 사람, 그리고 또 지금의 나이기도 하겠습니다.
그 모든 것들에 영향받으며 그냥 하자 마음먹습니다.
미래의 스케치북이 아니라 지금 내 손이 닿는 현재의 스케치북에 집중하자.
오늘도 제 손이 스케치북에 닿기를 바라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