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튼을 더 활짝 젖힙니다.
저희 집 베란다 앞으로는 아파트 동과 동 사이, 면적은 얼마 되지 않지만 나무들과 함께 야트막한 산이 보여요.
전에 살던 아파트는 앞뒤가 동과 동으로 모두 막혀 있어 나무 한 그루 보이지 않았고.
이사하려고 이 집을 처음 보러 왔을 때 베란다에 캠핑의자가 두 개 놓여있고, 앞 베란다 너머에 나무 몇 그루와 산이 보였는데 저는 그 틈새 풍경에 이미 마음이 홀랑 넘어갔던 게 생각납니다.
다른 집은 더 보지 않고 이 집으로 이사를 왔고, 그 이후 처음으로 운 좋게 한 집에서 5년째 살고 있습니다.
우리 동과는 달리 하늘도 산도 훤히 보이는 저 뒷동의 풍경을 자주 부러워하지만 아직은, 여기에 만족해야겠지요.
아무튼요, 그 틈새 풍경으로는 몇 개월째 갈색과 고동색 그 사이 어딘가의 색만 보였는데
요즘은 연둣빛 색이 돌아요.
연두는 경험으로 알지만 그래도 어떤 색인가 싶어 새삼 찾아보니
연할 연에 콩 두를 쓰고 있는 한자, '완두콩의 빛깔과 같이 연한 초록색'이라고 하네요.
완두콩레터를 쓰면서부터는 완두콩에 눈이 더 커지는 사람이 되었는데
안 그래도 좋았던 연두색이 더 반갑고 예뻐 보입니다.
조금 더 멀리엔 연한 분홍의 벚꽃과 노란 개나리가 보입니다.
겨울엔 모두 하나같이 나.뭇.가.지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 꽃나무가 무엇인지 몰랐는데
저기엔 벚꽃이 있었고 더 위엔 개나리가 있었구나 알게 됩니다.
모든 계절엔 제각각의 풍경이 있고 당연히도 이 계절에만 볼 수 있는 풍경이 있는데
확실히 봄은 파스텔 같아요. 모든 게 부드럽고 말랑말랑 연해요.
색깔마저 그렇네요.
아기의 볼 같은 계절이에요. 아이 예쁘다 소리가 절로 나오고 소중해서 만지기가 조심스럽고, 보기만 해도 미소가 나오는 계절이에요.
그러나 집 안 커튼 얘기를, 결국 거실에서 보이는 제 앞의 풍경을 이리도 길게 한 이유는
밖이 이렇게도 아름답지만 완연한 봄이 왔지만, 집 안에만 있다는 저의 자리를 말해주고 있네요.
아니 왜 멀쩡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체력은 훅 꺾기는 걸까요...
당황스럽습니다.
어제는 입술에 또 포진이 올라왔고요. 피곤을 온몸에 덮어쓴 듯 몸이 무겁고 무기력해졌습니다.
아무것도 못 하겠기에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하면서도 죄책감 가지며 시간을 쓰는데
남편이 제게, 내일의 나를 위해 죄책감 같은 건 갖지 말고 쉴 때는 푹 쉬라고 하더라고요.
그 말이 고맙긴 했지만 제 마음 제 마음대로 되면 얼마나 좋게요.
그래도 엊그제는 벚꽃 보러 혼자 산책도 다녀왔는데 사람이 아주 많았어요.
가지치기를 해서인지 예전처럼 풍성한 벚꽃은 아니었지만 꽃은 꽃이라 참 곱고 예쁘더라고요.
그런데 조금 아쉬웠어요. 꽃이 아쉽다는 얘기가 아니라 제 마음이요.
데시벨로 치자면요,
감상의 데시벨 세기가 낮아진 듯한 기분이 들었어요.
예전 같으면 우와-! 꽃이다!!!!! 꽃, 꽃, 꽃!
방방 뛰며 몸으로 표현은 못 해도 속으로 환호하며 엄청 좋아했을 텐데.
음, 꽃이구나~참 예쁘네~ 그렇게 느낌표 다섯 개가 물결로 돌아선 미묘한 느낌이 들었어요.
거긴 벚꽃터널인데요. 봄마다 사람이 모여드는 곳인데요.
저는 홀로 낮아진 제 마음을 느끼면서 아 왜 이러지, 왜 막 떠들썩해지지 않지.
꽃 앞에서 촐싹 거리고 싶은데.
왜 고요하지, 좋은데 왜 이리도 잠잠하지...
그랬다니까요. 그 마음이 이상했어요.
너... 피곤해서 그래... 무의식적으로 몸이 말을 하고 있던 걸까요.
이맘때 꽃이 있는 곳에 사람은 모여들기 마련이고, 그 당연함을 받아들이고 걷는 와중에
저 앞에도 이미 사람이 가득해서 저는 더 이상의 산책은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예쁜 거 보러 나온 사람들이, 잠시 멈춰 꽃 앞에서 웃고 사진 찍는 모습이 예뻐 보이다가도
나도 모르게 피곤해질 수 있으니까요.
주말부터 조금씩 조금씩 떨어지던 체력이 하필 그날, 유난히 더웠던 날씨에 우습게도 제 몸은 지쳤었나 봅니다.
저는 사실 호젓한 산책길을 걷고 싶었는지도요.
지금 생각해 보면 어느 날 저녁, 동네를 걷다가 홀로 핀 밤의 벚꽃을 우연히 보았을 때 더 반가웠던 것 같습니다.
제 몸의 피곤함에 이유를 찾아보면 고작, 겨우라는 말이 나오고 한없이 하찮아져서 제 몸에 화가 나고 원망이 드는데.
정말 그러고 싶지 않은데, 나도 바깥에 나가서 고운 파스텔 톤의 풍경을 느끼고 싶은데,
역시나 역시나 또 내 맘 같지 않아요.
꽃몸살은 꽃이 느끼는 것 같은데 사람도 갑자기 더웠다 추웠다 하는 이 시기에 꽃처럼 아플 수 있는 거겠죠.
스스로 위로하는 수밖에요.
그래도 이 시기를 놓치고 싶지 않으니
어제보다 더 환해졌네, 하며 집 안에서나마 벚꽃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여기서도 벚꽃은... 여전히 예쁘기만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