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요즘 우편함을 자주 들여다봤어요.
지난 5월 호주 여행에서, 제가 제게 편지를 썼거든요.
조금 유치하고 오글거리는 이 일을, 저는 꼭 해보고 싶었습니다.
십 년도 더 된 일이지만 해외 연수를 갔던 친구가 제게 편지를 보냈고, 그렇게 어느 날 제게 날아온 편지는 깜짝 선물 같은 기쁨을 주었습니다.
얼마 전 다시 만나 그 편지 이야기를 했는데 친구는 시간이 너무 남아서 그랬다고 별스럽지 않게 얘기하더라고요.
저는 그 친구의 쿨한 미소와 천진함이 여전히 좋았고, 그 옛날의 편지는 당연히도 영원히 잊을 수 없죠.
그 기쁨을 다시 받고 싶었습니다.
그 누가 해줄 수 없다면, 내가 나에게로.
과거의 내가 미래의 나에게로.
편지에는 언제나 시차가 발생하지만, 시간뿐 아니라 공간도 함께 담긴다면.
나라가 바뀐다면, 계절이 다르다면, 그것만으로도 특별한 편지가 될 것이라 생각했어요.
하루의 여행만을 남겨둔 밤 저는 제게 편지를 썼습니다.
여행지에서 혼자 깨어있는 밤은 사람을 몹시도 연약하게 만드니까 감상에 젖어 훌쩍거리면서도, 내게 보내는 다짐을 꾹꾹 눌러 담았습니다.
예쁜 편지지도 아니고, 그저 작은 노트를 북 찢어 쓴 한 장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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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여행 일정에 꼭 넣은 것은 우체국 방문.
마지막 날 시드니는 유난히도 날씨가 좋았고, 눈부신 오후에 우체국을 찾아갔습니다.
저 멀리서도 보이는 빨간색 포스트 간판은 눈에 띄고, 여기서 보니 몇 배나 더 반가웠습니다.
동네 우체국이 제겐 오늘 설레는 명소입니다.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잘 몰라서, 직원분에게 물어물어 봉투를 찾고.
테이블에 부착된 길게 줄 달린 우체국의 볼펜으로 우리 집 주소를 영어로 씁니다.
ㅡㅡㅡㅡ, Seoul, South Korea
나의 집으로부터 시작하는 주소 쓰기.
우리의 주소 쓰기가 '점점 작게'라면, 영어권의 주소 쓰기는 나로부터 시작해 '점점 크게'.
그 다름이 언제나 참 신기해요.
봉투에 틀리지 않으려 메모장에 써놓은 주소를 천천히 옮겨 적습니다.
영어로 집 주소를 써본 경험이 잘 없으니 낯설고 설렙니다.
봉투에 어젯밤 써놓은 다짐의 편지를 쏙 넣어 직원분에게 가져다드렸습니다.
이 간단한 일을 해놓고는, 이게 뭐라고, 뿌듯함이 샘솟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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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여행을 잘 마치고 서울로 돌아왔고, 일주일쯤 지난 뒤부터 우편함을 주시했습니다.
이렇게 무언가를 기다린 적이 있던가 싶을 만큼 외출할 때마다 우편함을 들여다보고.
내 편지가 없어 실망하고. 그런 아쉬움을 반복하다 아, 못 올 수도 있겠구나 싶은 마음까지.
이 얇은 편지봉투가 여기까지 오는 것도 약간의 기적이 아닐까, 대단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다 어느 날 다시 우편함을 보는데 관공서에서 왔나 싶은 흰 봉투가 보여 가벼운 마음으로 봉투를 들었는데.
세상에, 왔어요! 편지가 온 거예요.
구겨지고 상하고 그럴 줄 알았는데 너무나 그때 그 모습 그대로 왔어요.
달라진 것이 있다면 호주의 우체국 도장이 콩 찍힌 반가운 동그라미가 새겨졌지요.
5월 17일 금요일 시드니에서 보낸 편지는, 다음 달 6월 14일 금요일 저희 집 우편함에 도착했습니다.
온갖 것을 쉽고 빠르게 할 수 있는 이 세상에서, 내게 쓴 편지를 그냥 그대로 들고 올 수도 있는데, 굳이 굳이 기다림을 자처했습니다.
그렇게 받은 편지의 힘은 대단하고 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 다른 편지(片志)의 뜻에는 '자그마한 뜻'도 있다는 걸 이번에 처음 알았어요.
제게 이 편지는 정말 그러합니다.
그때의 기억과 다짐을 잊지 말라는 당부, 과거의 내가 미래의 내게 보낸 자그마한 뜻, 작은 의지가 담겨있습니다.
유난히 힘이 들 때 꺼내 펼쳐 보려고요. 이 작은 조각을요.
(그나저나 이 편지도 미색의 노트에 쓰였어요. 노랑에 가까운 색. 노랑에 힘 받는 요즘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