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재미있게 읽고 있는 책은 '시인들'이라는 박참새 작가의 대담집인데요.
이렇게 시작해요.
애호하기.
"난 그냥… 엄마가 날 좋아해 줬으면 좋겠어."
"물론 널 사랑하지."
"나도 알아. 근데 나를 좋아하냐고."
-영화 <레이디 버드> 중에서
저도 이 장면을 기억해요.
사랑과 좋음은 다른 것이었다?!
저 또한 충격을 받았던 장면.
"이렇듯 사랑하기와 좋아하기는 양립할 수 없다. 배합 금지, 상극, 틀린 전제… 하지만 '애호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대화의 차원이 달라진다. 거기엔 사랑愛과 좋음好이 모두 있기 때문이다. (…)
사랑과 좋음의 소용돌이에서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은 없거나, 있다면 거짓말쟁이이거나, 둘 중 하나다. 나는 당당히 유약했기에 모든 시 앞에서 무릎 꿇고 아파하면서도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계속 나의 옆에 있어주기를 부탁했다. 다행히 시는 사람이 아니어서 내가 떠나지 않는 이상 나를 떠날 일은 없어 보였다."
-박참새 대담집, 《시인들》, 세미콜론, 5-6p
참새 작가님이 애호하는 대상이 '시'라면, 제게 그것은 '그림'입니다.
다행이다. 그림은 나를 떠나지 않는다.
알고 있으면서도 쉽게 잊고 마는 사실.
울다 웃다가 흐뭇했다가 증오했다가 그러다 꼭 끌어안기.
사랑과 좋음이 모두 들어있는 것. 잡히지 않는 것. 접히지 않는 것.
그렇게 그림을 제 마음속 언저리에 늘 두고 있습니다.
-
그러한 어느 일요일,
저는 갤러리현대에서 하고 있는 <김기린: 무언의 영역> 전시에 갔습니다.
1층을 무엇인지 모르겠는 마음으로 보다가, 계단을 올라 2층 화면 속에서 화가를 만났습니다.
그는 이런 말을 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림을 나 자신이 반듯하게 서기 위해서 그리는 거지.
그 외엔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림이 뭐 내가 대단한 것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가끔 저는 그림 그린다는 것에 대단한 환상을 갖고 있었던 것 같아요.
누군가의 번듯한 모습을 보며 부러운 마음에, 그럴싸한 포장지 같은 마음을 쉽게도 함부로 가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절레절레.
반듯해지기 위한 그림이라니. 저 또한 그런 마음이고 싶었습니다.
번듯한 것이 아니라 반듯한 마음으로 대단치 않은 마음으로.
그래도 되는구나, 그렇게도 할 수 있구나.
그림에 대한 스스로의 정의를 다시 내리기도 했습니다.
그러자 도통 무엇인지 알 수 없었던 그의 그림이 다르게 다가왔습니다.
그날 저는 이 말을 잊지 않으려고 일기장에 적어두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오늘 저는 김창완 아저씨가 나온 세바시 토크를 보았습니다.
진행자는 김창완에게 물어요.
"노래는 왜 하는가"
그는 고민하는 듯 한숨을 길게 쉬더니 이렇게 말했어요.
"많이 다른 것 같아요.
옛날에는 노래를 왜 하는지 아는 것 같았어요.
근데 지금은 왜 하는지 모르는 것 같아요. 오히려.
하면 알아질 줄 알았죠. 근데 아닌 것 같아요.
근데 옛날에 안다고 했던 거는 오해고, 지금 모른다는 거는 이해가 돼요.
다만, 노래하면서 예전에 몰랐던 행복감 같은 게 있어요. 아주 황홀해요.
예전에는 "내가 이렇게 노래를 한다"고 생각하고 내가 노래를 불렀어요.
근데요 요즘은 내가 부르는 노래를, '내가 많이 들어요'
내가 나한테 노래를 들려주기 시작한 건 오래 안 돼요.
한 4년 된 것 같은데요.
그러고도 최근에 와서야 내 노래가 들려요.
늘 내 노래가 누구한테 가서 나비가 될 줄 알았는데
이젠 그 나비가 나한테 날아오는 거죠."
저는 이 말을 듣는데 대부분이 바깥으로 향해 있던 제 화살표가 보였어요.
잘 보이기 위해, 드러나기 위해.
정작, 나는 나를 위해 그린 그림이 있었던가.
나는 나 자신을 타박하고 자책하기 바빴습니다.
노력해야지, 성실해야지, 열심히 해야지, 실패도 좌절도 모두 맛봐야지.
알지요, 그래도 힘은 이런 데서 나오는 것 같습니다.
어른들이 툭, 토닥여주는 듯한 말에서요.
그래도 여전히 내가 그림에게 갖는 초조함, 조급함, 부담감 그런 무거운 숙제 같은 마음일랑 접으려도 접을 수 없지만.
반듯하기 위해 그리는 마음과 나를 위해 들려주는 나비 같은 마음을 이렇게라도 배웁니다.
사랑하기와 좋아하기 사이에서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