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집이 한동안 비어 있었는데 새로 이사를 와 공사를 시작했습니다.
비 오는 화요일에는 우리 집을 부수는 걸까 싶을 만큼 (쾅이 아니고 꽝,꽝,꽝!) 큰 소리에 깜짝 놀라 밖으로 대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의 도피처는 도서관.
운동화를 신을까... 하다 비가 많이 오니까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나갔습니다.
6년쯤 된 슬리퍼는 멀쩡한 듯 보여도 밑창의 홈이 다 사라질 정도로 매끈해졌지요.
비 오는 날 반바지를 입고 슬리퍼를 신으니 마음이 편안했어요.
맨살에 맨발에 빗물이 튀기는 건 아무래도 상관이 없으니까.
튼튼한 장우산을 쓰고 툭툭 편한 발로 걷고 걷다가 자연스레 보도블록의 테두리를 밟았는데, 순간, 한쪽 발이 미끄러졌습니다.
뒤에 사람이 있어 뒤뚱대던 내 모습을 봤을까 싶어 부끄럽다는 생각을 살짝 했지만 가장 크게 들었던 건, 휴, 깊은 안도.
손쓰지 못할 정도로 넘어지지 않고 바로 우뚝 서긴 했어도 등골이 오싹해지는 순간이었어요.
그런 것을 잠깐 경험하고 다시 걸으니, 빗물에 젖어 미끄러워 보이는 바닥들이 보였어요.
저 가게 앞 바닥은 저렇게 넓은데 온통 매끈한 자재네, 저기로 올라 걸으면 안 되겠다, 보도블록의 테두리는 특히 조심해야겠다 싶어
자유롭고 편했던 발에는 힘이 들어갔습니다.
무사히 도서관에 도착하니, 슬리퍼와 발은 홀랑 젖었지요.
물 묻은 발을 화장실에서 톡톡 닦아냈습니다.
우산은 곱게 접어 우산꽂이에 넣고, 도서관 서가를 훑어보기로 합니다.
고요한 도서관에 들어오니 쭉쭉, 삑삑, 아이의 작은 신발에서 날 것 같은 소리가 났습니다.
아이는 그럴 때 아장아장 귀엽기라도 하지만... 제 발에서 나는 소리는 전혀 예쁘지가 않았어요.
책장 넘기는 소리마저 잘 들리는 도서관이라, 신발과 내 발의 마찰을 최대한 줄이고자 조심조심 살금살금 걷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떠오르는 건 장화.
도서관을 오면서 몇몇 장화 신은 사람들을 봤어요.
슬리퍼는 너무 편안하고, 맨발은 훤해서 좋은데.
그래도 자꾸자꾸 장화에 시선이 가더라고요.
발목, 종아리, 혹은 무릎 밑까지 오는 튼튼한 고무장화들.
서로를 지나치는 짧은 순간에도 장화 위로 언뜻 보이는 흰 양말이 살짝 부러웠던 기억.
이렇게 비가 온대도 양말을 고민 없이 신었겠구나, 어떤 양말을 신어도 젖지 않겠구나.
장화를 신었다면 물웅덩이를 만나도 첨벙첨벙 마구 뛰어들 수도 있겠지.
튼튼한 장화 하나 장만할까, 몇 년째 고민이지만 여전히 신발장에는 없는 신.
비 내리던 몇 주 전의 토요일. 그날 만났던 친구의 아이는 예쁜 노란색 장화를 신고 있었어요.
다른 무엇보다 장화가 눈에 띄어서, 우리 OO이~ 오늘 예쁜 장화 신었네~라고 말했던 기억.
작은 아이의 노란색 장화가 어찌나 예쁘던지.
장화의 색을 대표하는 듯한 컬러는 거의 노랑.
하지만 과연 내가 장화를 산다면 샛노란 장화를 살 수 있을지, 미래의 장화 색을 고민해 보지만 왜인지 카키색이거나 검은색 일 것 같은 느낌이에요.
무난함 무난함, 조금 지겨워지려고 하는 무난함.
산뜻한 빨강색이거나 파릇한 연두색이면 어떨까.
그 언젠가의 장화를 색깔로 그려봅니다.
이렇게 상상해 볼 정도라면 역시 장화 한 켤레쯤 있어도 되지 않나...싶다가, 비가 또 이렇게 안 와버리니까요. 갖고 싶은 마음도, 부러운 마음도 쏙 들어가 버렸습니다.
비가 많이 오는 날, 밖에 나간다면 슬렁슬렁 저는 또 역시 맨발에 슬리퍼를 신겠죠.
이런 것도 시원한 계절에나 할 수 있는 일.
그나저나 이제 정말 이 닳고 닳은 슬리퍼도 보내줘야겠고, 비 오는 날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말끔하게 홈이 쏙 파인 새 슬리퍼가 제게는 더 필요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