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전쯤, 습관달력에 '일기 쓰기'를 적어두고 스티커를 붙이거나 동그라미를 그려서 하루의 뿌듯함을 확인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습관달력의 효과는 제게 통했고 손으로 일기 쓰는 시간이 잘 맞았던지, 그런 시간을 지나 이제는 정말 일기 쓰는 것이 몸에 배어서 일기를 쓰지 않으면... 뭔가가 마음에 걸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실 요즘은 그날 그날의 일기보다 밀린 일기를 쓰는 비중이 더 커지긴 했지만.
일기는, 언제나 홀로 씁니다.
종이에 적는 비공개 글인데... 저는 누군가를 의식하기도 합니다.
그 누군가는, 쓰는 사람인 동시에 읽는 사람인 저이기도 하겠지만 미래의 어떤 사람들을 의식해요.
나쁜 일에 있어서 굳이 실명을 밝히지 않거나, 거친 욕은 웬만하면 쓰지 않는다거나..
속마음을 백 퍼센트 일기장에 펼쳐놓지 못하고 이성의 끈을 완전히 놓지 못하는 나 자신.
그런데 세상에 내 마음을 완전히 '백 퍼센트' 표현할 수 있는 도구란 게 과연 있기는 할까.
이러한 의식 일기를 쓰는 것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그리고, 미래의 그 어떤 사람들은 대체 누굴까...!
그렇게 차곡차곡 모아둔 일기장을 보면 뿌듯하다가도, 부끄러워집니다.
이걸 뭐해, 이걸 어디다 쓰지...
그런데 저를 포함해 그 누군가라도 보지 않을 것이라면 이걸 왜 보관하고 있나 하는 생각도 들어요.
어쨌든 일기장엔 정말 너무 많은 것들이 들어 있어서, 만화적 상상을 더해 책을 털어 뭔가가 나온다면...
어마어마한 것들이 틱, 툭, 틱, 빵, 뽕 소리를 내며 나올 것이고, 그 양은 거대한 산을 이룰 것이에요.
그렇게 보자면, 대부분의 것들은 웬만하면 글로 쓸 수 있고 종이에 착 붙어 이만큼의 면적으로 조용히 지난날을 품고 있으니 다행이라는 생각도 합니다.
이러한 김에 책꽂이에 꽂아두었던 지난날의 일기장을 가져와 펼쳐봅니다.
2023년 6월의 일기를 털어 여기에 적어보아요.
아무리 쉼 주간이라 해도
집중해서 글을 보거나 쓰거나 그림을 그리려 했지만 잘되지 않았다.
일주일 시작인 어제도 일기 써야지, 했지만 또 미뤄지고 말았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일은 그렇게 계속 미뤄진다.
이것도 에너지가 드는 일이겠지.
나를 들여다봐야 하니까.
그 앞장에는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스터츠' 중 한 부분을 기록해 두기도 했어요.
"(삼각형을 그려두고, 가장 밑은 body / 가운데는 people / 가장 위에는 yourself 라고 쓰여있습니다.)
최고 단계는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요.
최선의 방법은 자기 무의식과 관계를 맺는 거죠.
무의식을 활성화하지 않으면 뭐가 내재됐는지 알 수 없으니까요.
한 가지 요책은 글쓰기예요. 글쓰기는 마법 같죠.
글을 쓰면 나 자신과 관계가 좋아져요. (…)
글쓰기는 거울 같은 역할을 해요. 무의식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여주죠.
일기 형식의 글을 쓰다 보면 본인도 몰랐던 것들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내요."
좋다고 이렇게 적어두기까지 했으면서, 기록이 없었다면 이 영상을 봤던 것도 잘 기억하지 못했을 거예요.
그리고 같은 해 5월 3일 기록에는 '일기'라고 제목 붙인 글이 있어요.
-일기
일기는
길 가다 누굴 만나서 스쳐가듯 하는 게 아니라
책상에 각 잡고 앉아
쓰게 된다
기록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나와 대화하는 것
생각이 내 앞으로 쏟아지는 것
그래서 저도 꾸준히 쓰나 봅니다.
흩어지지 않게 모아보려고.
밀린 일기라도 내가 뭘 했나 떠올려보며 나와 대화하려고.
얼마 전에는 일기장을 다 써서 새로 샀어요.
여름이라 시원한 파란색을 골랐어요.
아주 과감한 선택이었지요.
이 파란색의 일기장은 여름을 지나 어느 계절까지 갈 수 있을지요.
저는 여기서, 일기의 효용을 또 찾았어요.
이렇게 완두콩에도 소개할 수 있다는 것!
미래의 그 어떤 사람들은...
여러분이었다는... ☺︎
(종종 일기를 편지에 쓰곤 했지만요, 그 언젠가의 편지에 제 일기를 또다시 이렇게 미주알고주알, 털어버리는 날이 올지도 몰라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