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다가도 불쑥, 그저 쫙 뻗은 커다란 나무들이 보고 싶다거나 푸른 산이 무척 보고 싶을 때가 있어요.
가고 싶다, 보고 싶다.... 초록을 향한 마음!
그래서 우리는 떠나기로 했습니다.
이런 일을 며칠 만에 결정해 버렸어요.
1박 2일의 여정. 속초, 여름.
강원도의 풍경은 그냥 말 안 해도 훤히 다 펼쳐지니까 떠나기 전부터 흐흐거리게 되는 마음이 있었어요.
그러나 저는, 전 날 먹은 것이 탈이 나서 위염을 달고 출발했고, 대화하다 길을 한 번 잘못 들었더니 예상시간이 10분 더 늘어났고, 10분쯤이야 했던 시간은 금세 1시간으로 늘어났어요. 속초에서 누구와 시간 약속을 했다면 차 안에서 내내 초조할 뻔했습니다.
꽉 막힌 도로를 지나 이제 좀 쉴까 싶어 휴게소를 보니 진입로부터 차로 가득했습니다.
이 계절에 강원도로 떠나는 사람은 휴게소 상황만 봐도 짐작이 되고.
와- 차 많다 놀라며, 우리는 한 번도 쉬지 않고 곧장 강원도로 내달렸습니다.
강원도 날씨는 맑고 쨍하다고 했다던데 아니었습니다.
날씨는 흐렸고, 그 와중에 눈은 부셔서 인상이 찌푸려졌고.
양양 시장에서 먹은 점심은 영 맛이 없었습니다.
음 이게 아닌데.
날씨는 흐릴 수 있고, 식당의 메뉴가 영 내 입에 안 맞을 수도 있지만...
여행에서는 그런 게 그냥 다 아쉽잖아요.
속은 또 왜 아파서 별표 해 둔 식당엔 가지도 못하나, 막 다 원망스러운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요. 날씨를, 식당의 맛을, 내 아픈 속을 휙휙 바꿀 수가 없으니까요.
그냥 그럴 수도 있지, 마음 넉넉하게 가지기로 했습니다. 허허허 너털웃음 짓는 도사처럼 마음을 바꿔 먹어요.
여행지에서 씩씩대며 인상 쓰고 만 있을 수는 없고, 그럼 결국 나만 손해고. 내 마음 바꾸는 건 그나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니까.
속초에 왔으니까 문우당서림에 가기로 했습니다.
자주는 아니지만 올 때마다 놀라요, 참 좋아서요.
무슨 책을 사볼까 서가를 훑다가 다시 한번 널찍이 서점을 천천히 눈에 담으니 들어오는 것이 있었어요.
네모난 천정조명에 설치한 여러 문장들이.
그중 저는 이 문장이 훅 들어왔어요.
젊은 시절을 파리에서 보내는 행운을 누린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디를 가더라도 그 추억을 평생 간직하고 살아간다네. 그건 파리라는 도시가 머릿속에 담아서 가지고 다닐 수 있는 휴대용 축제나 마찬가지기 때문이지.
호주머니 속의 축제 Ⅰ 어니스트 헤밍웨이 / 민음사
여기 나는 비록 파리에 있는 몸은 아니지만, 어느 주말 속초로 여행을 왔지.
이 추억이 평생 갈지 안 갈지는 모를 일이나, 문장 속 '파리'를 내 어느 도시로 바꾸기만 한다면 나 또한 머릿속에 주머니 속에 넣어 다닐 작은 축제들이 얼마나 많을까 싶어 흐뭇해져 버렸습니다. 다행히 이미 머릿속에 가지고 있는 축제도 몇 개 있는 것 같고...
속초에 잡은 우리의 숙소는 울산바위가 보이는 리조트였습니다.
둘만 떠나온 가족은 우리뿐인 듯 보였고, 3인, 4인, 5인, 6인... 아이부터 어르신까지 아주 다양한 가족들이 로비에서 방 배정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로비는 여행객들로 시끌시끌했고, 번호가 띵동 울리면 창구로 가는 은행 시스템과 아주 비슷한 리조트의 로비.
저는 우리의 번호가 울리기를 기다리며 앉아 있었어요. 눈에 들어오는 가족들을 봅니다. 바리바리 싸온 짐들로 숙박의 시간을 유추하기도 하면서요.
모두 다 설렘을 끌어안고 왔겠지, 다들 어디서 왔을까, 얼마나 걸려서 왔을까, 언제부터 오늘을 기다렸을까, 그런 생각을 하니까 그 어수선함이 마냥 싫지 많은 않았어요.
우리의 방은 6층.
후기에서 분명히 봤는데요, 베란다에서 저 멀리 울산 바위가 훤히 펼쳐지는걸요.
하지만 커다랗고 하얀 구름이 다 가리고 있어서 내가 본 후기가 거짓말처럼 보였습니다.
에이... 저기 울산 바위가 있을 리 없어.
리조트라서 지하에 가니까 놀 거리가 많았습니다.
평소 탁구를 치고 싶었는데, 마침 여기 탁구장이 있어서 남편과 저는 탁구를 쳤지요.
배운 적이 없고 마음만 앞서서 엉망진창이지요.
그런데 이 스포츠 정말 너무너무 매력적이에요.
탁구채는 한쪽이 빨개요. 크기는 조금 큰 손바닥만 하고.
탁구공은... 탁구공은 너무 가벼워요. 색도 너무 예쁜, 진한 형광 살구색.
탁구대는 깊은 바다같이 파랗습니다.
훤하고 진한 색 대비로 눈도 함께 즐거워요.
핑퐁, 핑퐁 소리도 즐겁고요.
뒤이어 아이들이 있는 가족이 들어와 옆 탁구대에서 탁구를 치는데 모르긴 몰라도 나보다는 잘 치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내 공이 통통통 그쪽으로 넘어갈 때 자기 공처럼 얼른 주워 내게 주는 어린이의 순발력과 매너. 그리고 넘지 마시오, 하는 선은 없지만 각자 알아서 그 선을 잘 지키며 서로 배려하는 모습을 30분 동안 달게 느꼈습니다.
아아 이런 작은 면적에서 펼쳐지는 선한 스포츠라니, 얼른얼른 탁구를 배우러 가야겠다 싶었습니다.
작고 예쁜 탁구공은 늘 가방 속에 가지고 다니고 싶은 마음이에요.
그 짧은 시간에도 땀이 부쩍 나 운동이 되었고, 아픈 속은 90퍼센트쯤 다 나은 것 같았습니다.
다시 숙소의 방.
구름은 내내 산 중턱에서 물러날 생각을 않고, 신선이 있다면 저 안에서 우리 모르게 바둑이라도 둘 것 같은 분위기를 내내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운무로 자욱한 이런 풍경, 오히려 보기 힘들겠지...
침대가 있는 방은 창문이 없어 조금 답답할 것 같아 우리는 요를 깔고 거실에 누웠습니다.
에어컨도 필요 없고, 열어둔 베란다 창으로 시원한 산바람이 불어왔습니다.
여름방학이 이런 건가, 싶은 널브러짐.
놀러 온 기분이 물씬, 휴가를 왔다 싶은 기분이 많이도 들었습니다.
아직 잠들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아쉬운 마음.
여행은 조금 아쉬워야 하는 건가...
홀로 조용히 하는 나만의 루틴일랑 이날은 다 접고 잠들기로 했습니다.
이런저런 생각하다 눈 감고 뜨면 아침이겠지.
푹 자고 일어나니, 어제와 비슷한 날씨.
그러나 오늘은 다른 풍경.
저기 저 너머에 울산 바위가 보였습니다.
정말, 거짓말이 아니었다...
나 여기 있었어.
산 위로 보이는 귀한 바위의 얼굴.
이렇게 보여주니 더 반갑고 좋다.
신기하게, 속은 다 나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어느 주말을 속초에서 보내는 행운을 누린 사람'의 이야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