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일기
요즘은 하루 끝에 당일 일기를 쓰는 날보다 한 번에 밀린 일기를 쓰는 날이 더 많아졌습니다.
일기는 의무가 아니니까 후순위로 자꾸만 밀려납니다.
좋은 날은 좋은 채로, 나쁜 날은 나쁘니까, 피곤한 날은 어쩔 수 없으니까.
그렇게 하루 또 하루, 사흘, 나흘, 한 주를 가뿐하게 넘기고.
이번 주 월요일은 일기 써야지, 마음먹고 테이블에 앉았습니다.
쓰던 일기장을 다 써서 연휴 전에 얼른 구매까지 해놓고는 말이죠.
새 일기장을 이제야 폈습니다.
일기를 쓰려고 보니 11일 치가 쌓였습니다.
안 쓴 날은 안 쓴 대로 넘기면 그만인데, 저는 차곡차곡 날짜가 담기는 게 좋아서 어떻게든 매일 뭔가를 써놓으려고 해요.
세세히 기억나는 게 없으니, 휴대폰 사진첩에 의지해 그날 그날의 기록을 씁니다.
연휴 전에는 만둣국을 먹으러 갔고, 식혜를 6병 샀고, 전시를 보았고, 낙산공원에 올라가 보았고, 집에서 친구들과 케이크를 먹었고, 결혼을 앞둔 친구 커플을 축하해 주었고.
연휴에는 시가와 본가에서 1박씩 잤고, 엄마들이 해주는 맛있는 음식을 배불리 먹었고, 아빠가 캘리그래피로 쓴 감동 어린 용돈 봉투를 감사히 받기도 했고.
짧게 요약했지만 하루를 기록하다 보면 한 장이 빼곡해집니다.
연휴 지나 읽은 책은 '죽음의 바느질 클럽'
쉬는 것과 햇빛
즐거움과 슬픔
성장과 행복
불안함과 심각함
미소와 눈물
기다림과 아름다움
관심과 불타오름
흘러내림과 미술
안 좋은 느낌과 좋은 느낌
-복태와 한군, 《죽음의 바느질 클럽》 중에서, 마티, 274p
책을 쓴 복태와 한군님의 셋째 보음이가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와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면서 쓴 글. 자신의 마음속에 담긴 단어들을 묶어보았다고 해요.
책에는 그 기록이 사진으로 담겨있는데, 이 묶음의 단어와 함께 있는 글자는 '모두모두 사랑해'.
보음이 지은 근사한 연결, 거기에 '모두 모두 사랑해', 라고 쓴 글자에 저는 마음이 쿵 했지요.
즐거움도 슬픔도, 불안함과 심각함도...
그 모두를 품을 수 있는 것에 대해 생각했어요.
일기에는 일지처럼 사실만이 담기기도 하지만 결국은 내 이야기와 감정이 담길 수밖에 없는데, 그러면서 자기 치유를 하는 것 같기도 해요.
왕창 지나간 일들을 일기로 써보니 더욱더 그런 것 같았어요.
나를 위로할 수 있는 건 나뿐이었다. 뜻대로 되지 않는 일에 마음이 상하거나 외롭고 울적할 때, 밖에 나가 쇼핑을 하거나, 친구를 만나 수다를 떨거나, 산책을 하거나, 맛있는 걸 먹으면서 위로할 때도 있었지만, 그걸로 해소되지 않는 감정들이 있었다.
(…) 나직이 읊조리는 말들을 듣던 한군이 기타를 들고 와 멜로디를 붙일 때 알았다. 내 감정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그것을 어루만지는 일 역시 나만 할 수 있는 것이구나.
-위의 책, 283p.
일기는 나만이 쓸 수 있는 일.
복태님의 말처럼 내 감정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그것을 어루만지는 일은, 내가 해야 되는 것임을 다시 알게 됩니다.
12장 하고도 반쪽이 나온 밀린 일기, 손가락이 아플 때까지 쓴 일기.
오늘 하루 뭐 했냐고 누가 물으면 일기를 썼어요,라고 답할 수밖에 없던 하루.
일기 쓰는데 하루를 다 써버렸다고, 그런 하루도 있구나. 하고 덤덤하게 써놓고는 이것이 자랑이 될 수 있을까 싶고.
또 한편 나는 그런 것이 부끄러운 걸까 생각한 하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