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3일.
그날은 저희 할머니 제사가 있는 날이었습니다.
저희 집에 엄마 아빠 오빠 그리고 이모가 왔습니다.
차가 많이 밀려 여기까지 한참을 달려왔고 외삼촌 댁으로 가기 전, 저희 집에 잠깐 들렀습니다.
아빠는 새로 담근 김장김치를 무겁게 들고 오셨고, 엄마는 저희 집 베란다로 직행해 싱싱한 파를 베란다 화분에 심어주며 이거 봄까지 먹으면 될 거야 하셨지요. 이모는 우리 집에 처음 오며 아무것도 못 사와 미안하다 하시면서도 직접 구운 바삭한 김을 한 통이나 주셨고요.
오빠는 할머니 제사를 위해 이틀이나 휴가를 내고 어른들을 여기까지 모시고 온 사람.
식탁에 앉아 우리는 귤을 까먹었고, 따뜻한 차를 나눠마셨습니다.
잠깐 휴게소처럼 있다가 어른들은 할머니 제사에 가시고, 우리 둘은 집에 남아 조용히 할머니를 기렸지요.
똑떨어진 귤을 다시 주문하면서 3킬로를 살까 5킬로를 살까 고민했고, 추워진 날씨에 식물을 집 안에 들여놓으니 안심되었던 그 밤.
평온했던 밤이었습니다.
그 밤... 계엄령이라니.
인스타그램 속 캡처화면이 순간 진짜인가 의심했고, 포털사이트를 열어보니 뉴스속보가 떠 있습니다.
황당함은 분노로 바뀌었고, 불안과 공포로 이어졌습니다.
뉴스를 보면 볼수록 마음이 너무 괴로웠습니다.
평온했던 시간 같은 건, 하루아침에 없어질 수도 있구나 생각하니 끔찍했습니다.
안부와 일상을 나누고, 평범하게 넘어가는 시간들을 잃어버릴 뻔했습니다.
계엄령은 다행히 해제되었으나 후폭풍은 여전히 거세게 진행 중입니다.
그 일이 있고 난 다음날의 저녁, 6시가 다 된 시간.
마트에 들러 집에 돌아오는 언덕길, 제 앞을 걷고 있는 한 사람이 보였습니다.
언덕길이라 조금은 천천한 걸음걸이, 무채색의 도톰한 외투.
오른손엔 피자박스가, 왼쪽 손엔 빵빵한 딸기 무늬 장바구니-그 위로 봉긋 올라온 과자봉지.
누군가의 엄마일 것 같은 뒷모습. 저건 아이들 주려고 사 가는 저녁거리이려나 마음대로 상상했습니다.
저녁 할 힘이 없는 노곤한 하루니까.
오늘 저녁은 피자겠구나, 오늘은 아이가 특별히 더 예쁜 짓을 해서 과자를 짠, 하고 선물로 줄 것만 같은 양손을 보았습니다.
한 집 마다마다에 그려지는 따뜻함을 그려봅니다.
무사히 굴러가는 하루하루.
기본이라 생각하여 그 소중함을 잊고 지냈습니다.
많은 것들이 어떤 바탕에서 이루어지는가.
어떤 바탕에서 어떤 것이 태어나나.
나는 어떤 바탕 위에 서 있었나.
내가 누리고 있는 것이 어떤 것인지 다시 깨닫습니다.
내 바탕이 누군가로부터 흔들릴 수 있다고 생각하니 화가 나고 답답해지지만,
허무해지지 말자, 놓지 말자, 정신을 번쩍 차리고 있자. 다짐합니다.
며칠 전에 빌려온 책은 시요일이 엮은,
"내일 아침에는 정말 괜찮을 거예요."
그중 <가끔은 기쁨>이라는 시를 옮겨 봅니다.
가끔은 기쁨
-김사이
검은 얼룩이 천장 귀퉁이에 무늬로 있는 것
곰팡이꽃이 옷장 안에서 활짝 피어 있는 것
갈라진 벽 틈새로 바람이 드나드는 것
더우나 추우나 습한 부엌에서 벌레랑 같이 밥 먹는 것
화장실 바닥에 거무스름한 이끼들이 익숙한 것
검푸른 이끼가 마음 밑바닥을 덮고 있는 것
드러나지 않고 손길 닿지 않는 곳에
끈적끈적함이 붉은 상처처럼 배어 있는 것
삶 한켠이 기를 써도 마르지 않는 것
바람 한점 없이 햇볕 짱짱한 날
지상의 햇살 모두 끌어모아
집 안을 홀라당 뒤집어 환기시킬 때면
기름기 쫘악 빠진 삶이
가끔은 부드러워지고 말랑말랑해져
고슬고슬해진 세간들에 고마워서
그마저도 고마워서 순간의 기쁨으로 삼고
또 열심히 살아가는
내일 또 내일... 정말 나날이 더욱더 괜찮아지기를.
양손 가득 먹을 것을 움켜쥐고 언덕길을 오르던 한 사람의 뒷모습을 기억하며,
순간의 기쁨으로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부디 안온한 겨울이 되기를 바라며,
햇살이 비치길 바라면서,
오늘은 이렇게 편지를 마무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