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도서관 어린이자료실에 갔어요.
다니카와 슌타로가 글을 쓰고 와다 마코토가 그림을 그린 '구덩이'라는 그림책을 보았습니다.
제목과 표지가 익숙해서 오랜만에 다시 본 것이라 기억했지만, 처음 보는 것인가 싶을 만큼 인상적이었습니다.
구덩이가 아래로 오도록 가로로 펼쳐 있는 구성.
‘일요일 아침, 아무 할 일이 없어 히로는 구덩이를 파기로 했다’로 시작하는 이 그림책.
히로는 가족이 와서 물어도, 친구가 와서 물어도 구덩이를 왜 파는지 구덩이를 파서 뭐 할 건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저 묵묵히 구덩이를 팝니다.
하지만 손에 쥔 삽은 누구에게도 주지 않고 스스로 구덩이를 팝니다.
손바닥에 물집이 잡히고 귀 뒤에서 땀이 흐를 때까지 구덩이를 팝니다.
히로는 구덩이를 파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처음에는 구덩이를 파자고 결심했고 그렇게 파고 파고 또 파다가 애벌레를 만나는데요.
그 애벌레는 히로의 인사에도 잠자코 흙 속으로 되돌아가 버립니다. 그러자 히로는 어깨에서 힘이 쭉 빠지고 하던 일을 그만두고 쪼그려 앉게 됩니다. 갑자기 왜 힘이 쭉 빠졌는지, 히로는 애벌레에게 어떤 반응과 어떤 말을 듣고 싶었던 것인지 궁금해집니다.
그러나 애벌레 때문인지 덕분인지, 히로는 삽을 내려놓고 구덩이 안에 쪼그려 앉습니다.
구덩이 안은 조용했고 흙에서는 좋은 냄새가 났습니다. 그러고는 벽에 생긴 삽 자국을 만져보며 히로는 말합니다.
"이건 내 구덩이야."
히로가 만든 자신만의 구덩이, 그 안에 앉아 히로는 위를 쳐다봅니다.
구덩이 안에서 올려다 본 하늘은 여느 때보다 훨씬 파랗고 높아 보입니다.
구덩이는 나만의 동굴 같기도 하고, 놀이 같기도 하고, 취미나 특기, 혹은 내가 만든 작업물 같기도 합니다.
자신만의 무언가. 자신에게 꼭 필요한 감정이자 감각입니다.
구덩이를 파자고 결심하고, 삽을 남에게 맡기지 않고, 구덩이를 파다 땀을 흘리고, 파는 일을 스스로 멈출 줄 알며, 작지도 크지도 않은 자신만의 구덩이에 앉아 혼자 느끼는 몰입, 해방, 정화. 그 끝에서 발견하는 건 자신만의 몫.
명확하게 콕 집어 말해줄 수 없는 것을 그림책이 말하고 있었습니다.
한 권의 철학 책을 후루룩 단숨에 읽은 것 같았습니다.
자신만의 첫 번째 구덩이를 만들어본 사람이라면, 그 언제든 자신만의 구덩이를 다시 또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림책의 첫 문장을 다시 가져와 봅니다.
'일요일 아침, 아무 할 일이 없어 나는 ________________로 했다.'
여러분은 어떤 것으로 밑줄을 채우고 싶으신가요.
히로는 묵묵히 한 구덩이를 팠지만, 우리는 이런저런 다른 구덩이를 파볼 수도 있겠죠.
하지만 자신만의 구덩이를 파는 것은, 그리고 자신만의 구덩이를 찾는 것은 어떤 일인가, 은근 어려운 질문인 것 같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사실 오늘 어떤 편지를 써야 할지 고민이 많았는데, 그림책을 소개하려다 말이 이렇게 길어지고 말았습니다.
자신만의 구덩이 속에서, 은은한 해방감을 만끽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오늘의 편지는 이렇게 마무리해 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