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는 문학 작품, 사진, 그림, 조각 따위의 예술품을 창작하는 사람이라고 사전에 나옵니다.
하지만 제가 들었던 더 멋있는 작가의 정의가 있습니다.
"작가는, 집을 짓는 사람이에요."
그 장소는 서점이었고, 배경음악도 크지 않았기 때문에 옆에서 나누고 있는 대화가 들렸습니다.
그곳이 서점이 아니었고 배경음악이 아주 컸거나 휘리릭 물건을 골라 나가는 곳이었다면 그런 말이 스쳐 지나가도 몰랐을 텐데, 그 멋진 말은 포물선을 그리며 나를 적중한 화살처럼 쏙 날아 들어와 꽂혀 버렸습니다.
헉.
별스럽지 않게 흘러갈 말도 누군가에겐 이렇게 훅 날아와 기분 좋은 충격을 선사합니다.
게다가 작가에 '집 가(家)'자를 쓰고 있다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어요.
작가(作家)는 집을 짓는 사람이라는 것.
제게 해준 말도 아니었지만 그렇게 들려온 작가의 정의는 쉽게 풀어헤친 사전의 뜻 보다 훨씬 멋있는 말이라고 느껴 그 말을 잊지 않고 고이고이 간직하고 있습니다.
저는... 작가입니다.
아직 만인에게 열렬히 환호 받는 쪽은 아니지만 조용한 방구석에 앉아 연필을 꾹 쥐며 일기장에 꾸준히, 나는 작가다, 작가 정체성, 잊지 말자, 같은 문장을 적는 사람입니다.
저는 작가입니다.
작가로 살고 있다고 믿고 싶어요.
새해에 가족이 빙 둘러앉아 제 이야기를 할 차례가 왔을 때, "나는 그림 그리고 글 쓰고 그런 게 어렵긴 하지만 정말 너무 재미있고, 늙어서도 그림 그리고 글 쓰고 살고 싶다"고 했어요.
참 안개 같은 말이긴 하지만 그런 말을 뱉어놓고 제 스스로 엄청 근사한 사람이 된 것 같더라고요.
이루어놓은 것은 작은 책들과 쌓여가는 그림들, 조금은 부족하고 서투른 글들이지만 머뭇거림 없이 창작하는 사람이고 싶다는 것, 누가 시킨 일도 아닌데 그 두 가지는 오래오래 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아주 다행히도 제 현재의 과업은 그림과 글로 이루어져 있지만, 대체로 그림 쪽의 부등호가 훨씬 크긴 합니다.
그림을 보고, 그림에 대해 고민하고 그림 수업을 듣고, 좋은 그림이 모여 책이 될 수 있도록 바라고 노력합니다.
스스로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는 날, 혹은 내 뜻대로 주변 상황이 풀리지 않을 때, 화가 나 눈물이 나오기도 합니다. 나는 그림을 이렇게나 좋아하는데, 그림은 나를 따뜻한 시선 없이 매정하게 보는 것만 같을 때 제 짝사랑이 서러워 울기도 합니다.
하지만 눈물 닦고 책상에 앉아 보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그리지 않은 날은 아무것도 되지 않지만, 뭐라도 그렸을 때 실패든 성공이든 모자라든 맘에 들든 그 어느 쪽에라도 설 수 있으니까요.
그림엔 아무 죄가 없다는 당연한 사실과 책상에 앉으면 어떤 결과든 뭔가 나올 수 있는 분명한 사실을 이렇게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저는, 책상에 앉는 것조차 잘 안될 때가 많아요.
글은 역시 당연하게도 쓰는 쪽보다 보는 쪽을 더 좋아합니다.
남들이 써놓은 글이 훨씬 좋고 재밌고 그렇습니다.
그러나 하고 싶다는 제 의지로 완두콩을 시작하게 됐고 제 글이 초반에는 안부 글 정도의 분량으로 짧다가 어느 순간에는 레터의 반이 다 되어갈 정도로 길어지기도 합니다. 은근히 하고 싶은 말이 많고 글을 잘 축약하지 못하는 부족한 역량 탓이 큽니다.
하지만 글을 전달하는 와중에 발신인의 솟아오르는 뿌듯함을 조금 알게 되었고... 그렇게 계속 즐겁고만 싶지만 여전히 어떻게 써야 할지 몰라 글 앞에서 대부분은 쩔쩔매고 있어요.
그렇지만 그림과 글, 둘 모두에게 꾸준함도 재능이라는 말을 철석같이 붙여보며 일단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저는 요리하는 것에 거대한 흥미는 없지만 몇 년간의 경험으로 화구를 두세 개씩 돌리며 몇 인분의 요리를 척척 차려낼 때 제 스스로가 아주 숙련된 사람인 것처럼 느낍니다.
그러나 하얀 도화지 앞에서, 그리고 이렇게 커서가 깜박이는 화면 안에서는 아주아주 느리고 막막한 사람이 됩니다.
집을 짓는 사람이 작가니까, 그 멋진 말을 귀담아들었으니까, 마음에 품었으니까, 저는 아주 멋진 집을 짓고 싶은 것입니다.
좋은 재료를 써서 아주 튼튼하고 오래가는 멋진 집을 말이죠.
욕심이 나고 늘 힘이 들어가서 그 힘을 내기 위해 예열이 필요한 듯 자주 머뭇거립니다.
막강한 힘이 없는 것만 같아 여전히 헤매고 있습니다.
아직도 이렇게 약하고 서툴러 답답한 마음에 집 잘 짓는 사람들이 누가 있나 봅니다. 찾아갑니다.
어디서 영감을 받았지? 어떤 재료를 썼지? 어떻게 이렇게 멋진 집을 만든 거지?
저는 그런 것이 늘 아주 많이 궁금합니다.
아무리 오래 보아도 그 집은 절대 내 집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좋은 선배들의 집을 샅샅이 보며 공부하는 것은 내 집을 지을 때 아주 큰 도움이 된다는 것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렇게 예열을 받아 힘을 얻기도 하고, 질투를 하며 자극을 받기도 합니다.
다행인 것은 그런 선배들이 과거부터 현재까지 아주 굉장히 대단히 많다는 것.
봐야 할 것은 태산이지만 그래도 즐겁습니다.
땀과 눈물을 흘리며 뚝딱뚝딱 망치질을 멈추지 않고, 집 짓는 이 일을 계속 계속 하다 보면 이 넓고 넓은 땅에 뭐 하나가 또 올라오겠죠.
어떻게든 만들어 지은 나만의 집이 말이죠.
저는 오래오래, 집을 짓는 작가이고 싶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