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주 동안 안녕하셨나요, 벌써 1월의 마지막 주에 왔네요. 연휴를 앞두고 편지를 드립니다. 이번 편지도 잘 읽어주세요 :) 🔍 탐구력을 품은 채로 초등학교 때 학교에서 나눠주었던 탐구생활 교재가 어렴풋이 기억납니다. 그것을 방학 때 나눠주는 이유는 스스로 읽고 쓰고 무언가를 만들고 자연 속으로 나가 동식물을 탐구하며 상상력과 창의성, 자발적인 학습 태도를 길러주기 위함이었겠으나, 저는 그것을 꼼꼼히 즐겁게 다 채워본 적은 없습니다. 제게 탐구생활 교재는 억지로 채워야 하는 하기 싫은 숙제나 의무였고 그래서 빈 페이지도 여럿 있었고, 그렇다고 모두 다 빈 페이지로 덜렁덜렁 들고 갈 배짱 같은 것은 또 없어서 대충과 최선을 왔다 갔다 하며 여자 저차 무언가를 쓰고 붙여 조금은 도톰해진 탐구생활을 부랴부랴 개학 때 가져가기 일쑤였지요. 그렇게 채운 제 탐구생활은 때마다 그렇게 볼품없을 수가 없었어요. 개학을 하고 보면 종이가 물에 젖어 퉁퉁 불어 오른 것 같은, 악어 입처럼 종이가 입을 벌린 듯한, 백과사전만큼의 두께로 탐구생활을 꽉 채워 만들어오는 친구들이 꼭 있었거든요. 그렇게 열심히 두껍게 최선을 다해 탐구생활을 만든 학생에게는 상도 주고 전시도 열어주었어요. 저는 한 번도 그 상을 받아본 적도 없고 복도에 제 책이 전시된 적도 없습니다. 탐구생활 책 속 안에는 앉은 자리에서 휘리릭 할 수 있는 간단한 것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체험하는 학습 공간이 더 많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사진이며 종이며 다양한 결과들을 붙여야만 생기는 그러한 두툼함은 나오지 않았을 테니까요. 저는 그 두꺼운 탐구생활 책들을 멋지게 바라보는 한 편, 책 속의 친구들을 많이 부러워했습니다. 참 잘 만들었군, 이런 것을 보았구나, 정말 멋진 곳을 다녀왔네.. 치.. 속으로 시샘하기 바빴지요. 이제 와 다시 그 탐구생활을 받는다면 상을 받을 수 있을 만큼 멋지게 만들 수 있을지, 사실 지금도 큰 자신이 없습니다. 저는 제 그릇 넘치는 큰 욕심을 부리지도 않고 두툼한 배짱은 없는 채로 대충과 최선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이렇게 무던한 어른이 되었지요. 매 페이지마다 이벤트는 없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수수하게 잘 보내고 있어요. 그러면서도 여전히 누군가의 멋진 것을 보면서는 한가득 질투합니다. 사람은 크게 바뀌는 것 같지 않지만 그래도 달라진 것이 있다면 지금은 스스로 무언가를 탐구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선뜻 알고 싶어 하는 마음, 궁금히 여기는 마음, 다행히 제 안에 탐구력이 자란 것이지요. 탐구력을 품은 채 다른 이의 멋진 탐구생활에는 여전히 눈을 흘기지만 그 대단함을 귀히 여기며 손뼉 치고 칭찬할 줄 압니다. (역시 나아진 부분입니다..) 거기에 더하고 싶은 것은 빈 페이지는 빈 페이지대로 둘 수 있는 두둑한 배짱. 채울 페이지라면 누가 만들어놓은 것 말고 스스로 만든 무언가에 욕심도 내고 최선의 비중을 힘껏 늘리는 것. 그렇게 저는 나만의 탐구생활을 열심히 즐겁게 이어나가며 더 더 잘 자라고 싶습니다. 그런 어여쁜 어른이 되어 나 스스로 잘했다고 상도 주고 쓰다듬어 주는 것도 충분히 괜찮을 것 같아요. 남들 눈치 보지 않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좋아한다 말하고 지루한 것을 의무감으로 견디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낯선 것에 도전해 보려는 용기, 재미없는 것을 좀 더 견뎌 보는 노력, 잘 모르는 것을 이해해 보려는 안간힘을 포기하지 않으려 한다. '재판관'의 마음이 아니라 '탐구자'의 마음으로. 잘 몰라서 그렇지 좋아하게 될지도 모르잖아? 세상에는 내가 모르는 좋은 것이 아직 많을지도 모르잖아? -이현주, <읽는 삶, 만드는 삶>, 유유, 74p 세상에 내가 모르는 것이 얼마나 많을까, 생각하면 아득해지다가도 궁금해져서 마음이 바빠집니다. 그러나 천천히, 언제나, 탐구자의 마음을 잊지 않을래요. 🐦 첫 탐조의 날 며칠 전 국립수목원에서 운영하는 '광릉숲 겨울 철새 탐조 프로그램'에 다녀왔습니다. 이날은 보슬비가 내리기도 하고 날이 흐려서인지 선착순 15명임에도 저희 일행 셋이 전부였습니다. 그래서 더 신 이 나기도 했고, 첫 탐조를 하는 날이라 저는 매우 들떴습니다. 새는 하늘과 땅 사이를 날아다니는 '사이'를 줄여서, 또는 '수(樹) + 아이' 가 줄어서 새가 되었다고 하는데요. 두 가지 어원 모두 마음에 들고 참 근사합니다. 정말 아름답지 않나요, 하늘과 땅 사이를 날아다니는 새, 나무의 아이인 새. 새 뜻의 유래도 탐조 프로그램이 아니었다면 절대 몰랐을 거예요. 본격적인 탐조활동에 앞서서는 겨울 숲에서 만나볼 수 있는 새 종류와 특징, 탐조 시 유의 사항에 대해 들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흥분됐던 것은, 쌍.안.경! 프로그램을 위해 나누어주는 작고 가벼운 쌍안경을 목에 걸어요. 으으 저는 너무 좋아서 목에 메달을 건 듯 속이 간지럽고 기분이 밝아졌어요. (감각기관이 예민한 새들에게 가까이 가지 않기 위해서는 탐조활동 시 쌍안경은 필수 장비인 듯했습니다.) 출처: 국립수목원 인스타그램 새 전문가님은 어찌나 유쾌하고 지식이 풍부하시던지, 90분 내내 지루할 틈 없이 족집게 강사처럼 기억하기 쉬운 설명을 해주시며 이미지를 덧붙여 유익한 정보들을 많이 많이 들려주셨어요. 새도 사람처럼 흐린 날 탓인지 밖으로 잘 나오지 않아 책자에 나온 것만큼 여러 종의 새들을 보지는 못했지만, 청도요와 원앙, 노랑턱멧새를 맨눈으로 혹은 쌍안경으로 초점 맞춰가며 보았습니다. 햇병아리 같은 탐구자의 시선으로 눈 반짝이며 시간을 보냈고 아름답고 신나고 짜릿한 경험을 했습니다. 한번 눈에 띈 것은 쉽게 지나치지 못하고 계속 계속 눈에 띄고 보이듯이, 제 눈에 이제는 여러 종의 새가 눈에 띄고 보일 것 같은 강한 예감이 들어요. 더 많은 새들의 이름과 생김새와 소리들을 알고 싶어졌습니다. 👀 ✅ 참여하고 싶은 분들은 아래 안내사항을 참고해주세요. <광릉숲 겨울 철새 탐조 프로그램> 🌳 국립수목원, 경기 포천시 소홀읍 광릉수목원로 415 ◽️ 1월 8일부터 2월 말까지 두 달간 오전 10시에 매일 진행 ◽️ '국립수목원 숲해설센터'에 방문하여 직접 참여 신청 (선착순 현장 접수 15명) ◽️ 탐조를 위한 쌍안경 수령, 전문가와 함께 90분간 국립수목원에서 겨울 철새 관찰 📗 수목원을 담은 책 독립출판물이었던 '어떤 날 수목원' 은(왼), 두께와 이야기가 더해진 멋진 양장본으로 필무렵 출판사에서 새로 나왔습니다.(오) 이번 주말에는 낮 기온이 평년보다 삼사 도 가량 오를 것으로 보입니다. 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책이 있습니다. 바로 한요 작가님의 <어떤 날, 수목원>이라는 책이지요. 이 책은 수목원에서 만난 아름다운 장면들을 따뜻한 색연필 드로잉으로 담은 책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수목원이 제가 다녀온 그 국립수목원이고요, 그래서 그림책 속에 있는 나무들을 만날 때면 얼마나 반가웠는지 몰라요 :) 게다가 이 책 안에는 드로잉뿐만 아니라 수목원을 걸으며 떠올랐던 단상들이 시처럼 적혀 있어 그림과 글을 함께 감상하기에 더없이 좋은 책입니다. 작가 노트에는 이런 글이 있어요. 그림들 위에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땐, 쓸 수 있는 게 내 얘기뿐이었으므로 목적 없는 산책자처럼 떠오르는 것들을 쓰기 시작했다. 그건 너른 품을 내어주는 장소에 나의 시간들을 계속 엮어 넣는 일이었다. 때로는 동행이, 때로는 날씨가, 때로는 지나간 일과 먼 미래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수목원에 가고 싶을 때, 가는 길에, 그곳을 걸을 때, 돌아올 때, 돌아와 집에서 그림을 그릴 때. 그러고 보면 사실 정말 좋은 순간은 기록이 남지 않은 빈 페이지에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저 또한 이 문장에 공감이 갔던 이유는 정말 정말 좋았던 탐조의 날에 일기를 쓰지 못했어요. 무엇인가 쓰지 않아도, 좋았던 경험과 감정이 몸과 마음에 남아서 그저 꼭 안고 푹 잤거든요. 역시 이유 있는 빈 페이지는 여유 있고 그런대로 참 멋진 것이기도 합니다. 😌 🎼 난 그냥 집에 가고 싶어 Rendy Pandugo - HOME ♬ 환상이란 게 무엇인지 말해줘요. 그 누가 현실에 살고 있나요, 당신이 그 답을 알려줄래요? 가식적인 웃음은 하지 말고요, 아니면 그게 축복인 걸까요. 잘 모르겠어요. 그저 난 그냥 집에 가고 싶어요. 설날을 앞두고 집에 관한 음악을 가져와 보았습니다. Rendy Pandugo는 인도네시아 가수입니다. 어떤 곡을 추천해 드릴까 고민하며 여러 음악을 듣다가 새로이 알게 된 가수예요. 편안함이 느껴지는 곡이니 집에 내려가는 길에 혹은 어디가 되었든 안전하고 따뜻한 공간에서 잔잔한 이 음악을 들어보세요. ☺️ P.S. 저는 새로운 달 2월에 다시 찾아올게요! 훈기 가득한, 달디단 행복이 오래 머무르는 즐거운 연휴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 NOTE 꾸준한 뉴스레터를 잘 만들기 위해 후원을 받고 있습니다. 보내주시는 후원금은 감사히 소중히 잘 받아 더 나은 양질의 컨텐츠로 보답하겠습니다. 🚀 뉴스레터 후원 🚀 3333-04-0148917 (카카오뱅크, 정혜련) (후원이라는 이야기에 부담 갖지 마세요, 떠나가지 마세요. 후원은 자유입니다.) 꾸준히 읽어주신 것만도 제겐 더없는 후원이고 크나큰 힘입니다. 완두콩 구독자분들 언제나 감사드려요! 💚 mind_ryeon@naver.com 수신거부 Unsubscribe |
✦ (정)혜련이가 보내는 편지, HYEPEA LETTE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