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거슬렸던 집 안의 여러 곳을 며칠에 나누어 청소했습니다.
그곳들을 차례차례 알려드리자면
부엌의 후드, 입지 않는 옷, 그리고 대체 어디서부터 건드려야 할지 답이 잘 나오지 않는 작업방이었습니다.
사실 이 정리는 날을 잡고 꼼꼼하게 계획했던 일이 아니었고, 따가운 눈초리가 가던 곳들에 갑자기 어떤 바람이 불어 가볍게 손을 대볼까 했는데 그것이 걷잡을 수 없는 일이 되어 마무리까지 해야 하는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그리하여 오늘의 이야기는 청소에 관한 이야기.
첫 번째로 손을 댄 것은 부엌의 후드였어요.
이곳은 약간 베란다 창틀 같습니다.
나도 모르는 새 바깥의 먼지가 어느샌가 새까맣게 끼어버리듯, 부엌 환풍기 후드도 그저 요리를 할 때마다 켰던 것뿐인데 어느샌가 보면 노란 기름때가 아주 덕지덕지 끼어 있습니다.
정말 정말 하기 싫은 일 중 하나는 자기들끼리 아주 단단히 뭉쳐있는 굳어진 기름때를 청소하는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럴 때엔 방금 먹은 그릇을 설거지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아주 꾸준하고 센 힘이 필요합니다.
쓱쓱쓱쓱, 박박박박을 반복합니다.
그 사이 청소도구로 전락한 칫솔모는 아주 헝클어지고 제멋대로 뻗쳐 녹다운.
이제는 정말 그 어떤 용도로도 쓰지 못하는 칫솔이 되었습니다.
고작 A4용지 크기만 한 후드 2개를 청소하고 환풍기의 지붕 같은 곳을 청소한 것뿐인데 다 하고 났더니 손목이 시큰해져 파스를 붙여야만 했습니다.
이런 곳을 청소하고 난 뒤엔 기분이 약간 멍해집니다.
나 뭐 했지, 싶은데 2시간 가까이 시간은 순삭 되었고, 지금 막 기름진 청소의 세계에서 빠져나온 사람의 얼굴에는 개운함보다는 무지막지한 기름때와의 싸움에서 진 듯한 느낌, 약간의 허무함과 멍함, 그리고 지친 기색이 역력합니다.
제 모습 또한 이제 더 이상은 못 하겠다고 제멋대로 뻗어버린 칫솔이 되었습니다.
힘들었다고 남편에게 엄살을 부렸더니 '철벽방어 후드커버'를 구매했더라고요.
세상에, 이런 것이 있었습니다.
왜 저는 여태 그런 장비를 몰랐을까요.
반갑게 도착한 후드커버가 기름때를 철벽 방어해 줄 것이라고 기대하며 부직포같이 생긴 하얀 커버를 후드에 부착했습니다.
붙이기만 하면 되는, 시간이 아주 짧게 걸리는 작고 귀여운 공사였지요.
이제는 이 하얀 부직포 같은 것에 각종 요리들의 기름때가 낄 것이고, 그 후엔 커버만 휘리릭 제거하면 될 것입니다.
이 후드커버가 이제 저 대신 기름때와 싸울 것입니다.
제 기분과 몸과 마음이 아주 살짝 살아납니다.
두 번째로는 옷 정리.
1년인가, 2년인가 입지 않는 옷은 버려도 된다는 말이 있던데 저는 그런 옷들이 은근 많습니다.
이사 때마다 정리를 해도 끝까지 살아남는 옷들이 있어요.
아 이건 엄마가 선물해 준 건데, 아 이건 내가 진짜 아끼던 옷이었는데, 아 이건 나중에 유행이 다시 오지 않을까, 아 이건 정말 새 거잖아, 하는 그런 과거형의 옷들.
떠오르면 생각나는 추억이 있거나 추억은 없어도 몇 번 입지 않아 버리기엔 아깝거나.
하지만 옷 정리에 앞서 조금은 과감해져 보기로 합니다.
목이 조금 늘어난, 주름이 많이 가는, 조금 해진 옷들은 잘 입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외출옷에서 전락하여 버릴랑 말랑의 기로에 있는 옷을 홈웨어랍시고 입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목 늘어난 티가 집에 수두룩합니다만.. 🙄)
버릴 옷들을 정리합니다. 옷이 한 무더기로 나왔습니다.
버릴 때면 시원하기도 하지만 뭔가 모를 불편함과 무거움이 있습니다.
어딘가에 쌓여 쓰레기를 만들 것이니까요.
이왕 산다면 좋은 것을 사서 애정 있게 오래오래 입기로.
옷을 아예 사지 말자는 극단적인 선택보다는 사고 버리는 그 주기와 순환이 길고 길도록 옷을 살 때에 한 번 더, 한 번 더 고민하기로 합니다.
옷을 버리면서 또 언젠가 살 것을 고민하는 저는.. 그저 여전한 소비자이지요.
마지막으로 제 작업방 이야기를 할게요.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어요... 언제 이렇게 엉망이 된 것인지...
제 작업방에 죄를 지은 듯한 말투가 나옵니다.
역시 이곳도 베란다 창틀에 먼지가 쌓이듯 차츰차츰 벌어진 일이고, 어지럽게 더럽힌 것은 그 누구도 아닌 저입니다.
몇 날 며칠을 방해물 건너뛰듯 방 안에서 널브러진 물건들 사이를 요리조리 피해 다녔습니다.
여느 작가들의 작업실을 보면 어느 곳은 아주 깔끔하게 정리 정돈되어 있고, 어느 작업실은 또 엄청나게 어질러진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각자 성향과 작업 방식에 따라 공간의 모습은 다른 것이지만 저는 약간 어질러지고 널브러진 와중에도 그 나름의 규칙과 동선이 있는 후자 쪽의 작업실에 더 마음이 갑니다.
그래서 그렇게 의도한 것이냐 하면 그건 절대 아니고요...
아마 이것저것 정리되지 않은 제 마음 상태가 제 작업방에도 고스란히 남아있어서인 것 같습니다.
정리되지 않음은 정리되지 않음을 낳고, 더러움은 더러움을 낳고...
악순환이 반복됩니다.
작업에 관해서는 제일 많은 생각을 하고 있음에도 그에 따른 결과는 잘 모르겠고, 그렇다고 또 작업에만 무진장 매달리고 있는 것은 아니니 가끔은 제 자신이 답답하기도 하고요.
정리되지 않은 채 널브러진 작업들이 쌓이고 쌓여서 결국은 이런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작업을 하려고 책상을 보니, 작업할 공간이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더러워진 책상 위에는 쓰다만 종이와 연필, 지우개 가루, 오일 파스텔, 색연필, 목탄, 휴지, 장갑 등등이 나뒹굴고, 바닥에는 작업을 하다 후다닥 정리한답시고 한곳에 모아둔 종이들이, 책들이, 작업물들이 갈 곳을 잃고 누워 있습니다.
모든 재료들을 다 쓰고 난 뒤 제자리에 두었으면 될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재료와 종이들이 쌓이고, 그것들을 제때제때 보관하지 못해 이런 상태가 되었습니다.
도저히 이런 방구석에서는 작업이 어려울 것 같아 작업을 뒤로 미루고 팔을 걷어붙이고 하나하나 치우기 시작합니다.
버릴 것들을 버리고, 정리하고 분류하고, 쓸고 닦습니다.
다시 보지 않을 것 같은 자잘한 종이들, 엽서들, 그림들도 과감하게 버립니다.
꽉 찬 쓰레기통까지 비우고 나니 10리터 쓰레기봉투가 꽈악 채워졌습니다.
손에 꼈던 장갑은 거뭇해지고 허리가 아프도록 치우고 정리하고 났더니 방이 커지고 환해졌습니다.
이제 조금 작업할 맛이 나지만 작업할 체력은 남아있지 않은 피로한 새벽.
노곤한 몸이 되었지만 침대에 누울 때는 큰일을 하나 한 듯 기쁨으로 잠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후드 청소나 옷 정리나 작업방 청소나 어쨌든 이렇게 어느 날, 노려보았던 모든 곳들을 미션 클리어하듯 해치웠습니다.
느낀 것은 여러 가지.
요즘 내게 있는 시간과 마음의 여유, 이 정도면 괜찮은 몸의 컨디션.
해야지 해야지, 마음먹다 보면 어느 날 갑자기라도 하긴 하는, 스스로 낸 결과의 뿌듯함.
청소 뒤에 찾아오는 개운함과 쾌적함.
이 모든 청소의 시작은 어느 날에 벌어진 은근슬쩍이었으나, 청소 후 기분의 끝은 모두 해피엔딩이니 그것으로 저는 큰 것을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