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구례를 시작으로 순천, 여수, 하동에서 머물렀고, 전주를 거쳐 올라왔습니다.
여행을 다녀온 다음날에는 한가득 쌓인 빨래를 두 번 돌리고, 집 안 구석구석을 닦고, 며칠 동안 목말랐을 식물에게 물을 듬뿍 주었습니다.
그러고는 컴퓨터 앞에 앉았습니다.
며칠 동안의 여행기로 충만해졌다고 생각한 저는 완두콩에 쓸 말이 아주 많을 것이었습니다.
구례의 대나무숲은, 순천의 와온해변은, 여수의 밤바다는, 하동에서 보았던 아름다운 길, 강, 평야, 산맥들은...
백 년 된 한옥에서는, 새소리에 잠이 깨던 아침에는, 쏟아지는 별빛을 본 밤에는...
그렇게 다 준비된 사람처럼 컴퓨터 앞에 앉아 글을 쓰려는데 막상 쓸 말이 잘 정리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날 숙소에서 샤워를 하면서 기록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아주 오랜만에 여행지에서 일기를 단 한 장도 쓰지 않았다는 것을 새삼스레 떠올렸어요.
그날 그날 무언가를 봤어도 SNS에 올리지 않았습니다.
기록은 과연 좋은 것일까, 기록이 과연 좋기만 한 것일까.
얼마 전에는 제 싸이월드에 들어갔습니다.
가장 먼저 한 일은 저만 볼 수 있도록 얼른 비공개 계정으로 바꾸어 놓는 것.
그것은 혼자 보려고 썼던 일기장 같아서 누굴 보여주기가 아주 민망하고 부끄러웠습니다.
10년쯤 된 기록들은 먼 과거 같기도 하면서 또 엊그제 같기도 했습니다.
예전에는 자랑삼아 올려놓은 것일 텐데 모두 비공개로 돌려놓고 보니 마음이 아주 편안해졌습니다.
기록은 공개 여부가 어디까지인지가 중요한 것이구나 싶어요.
어느 여행에서는 여행 가기 전 여행 노트를 부러 사기도 했습니다.
그러고는 여행지에 가서 그날 썼던 영수증을 모으고, 갔던 장소, 먹었던 음식들, 샀던 물건들을 기억하며 열심히 붙이고 그리고 쓰고 기록했습니다.
그렇게 기록하는 몇 십분이 하루의 마지막 정리이자 일과였습니다.
또 다른 여행에서는 그날 보고 느꼈던 감상에 대해 문장을 적고, 또 어떤 때는 스케치북과 색연필을 챙겨가 그림을 그리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여행지에서의 하루 끝이 약간 아쉬웠던 걸까요.
근데 과연 그것이 내가 진짜로 하고 싶었던 걸까...
약간 스스로에게 내주는 숙제나 의무 같은 것, 혹은 자랑을 위한 도구이기도 했나.
그때그때 느꼈던 온전한 감흥이 하루 끝까지 가기는 어려울 테고, 기록해 보려는 저문 시간에는 모든 것들이 조금씩 옅어져 있을 테니 여행지에서의 특별함, 놀라움, 만족감 등을 영수증, 그림, 글 등으로나마 한 번 더 채우고 싶었던 걸까.
누군가의 멋들어진 기록이 부러워 흉내 내고 싶었던 걸까.
멋진 디자인의 노트와 펜을 가지고 다니며 아날로그적인 감성의 소유자라는 분위기가 갖고 싶었던 걸까.
이렇게 저렇게 생각해 봅니다.
(일기를 쓰면서 느끼지만 기록은 정말 사실이기만 할까, 하고 생각하는 때가 자주 있습니다.
정말 정말 뼛속 깊이 느끼는 저의 감정들을 백 프로 온전히 싣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많아요.
내가 나를 검열하는 기분, 이것을 누가 본다면... 하는 막연한 상상, 그 누가 나일 확률이 가장 높을 테지만 훗날 내가 봤을 때 나는 좀 어딘가 모자란 듯하지만 노력하며 애쓰고 있는 인상을 줘야 할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히고, 또 어떤 날은 제 감정이 정확히 잘 표현되지 않아 답답하기도 하지요.
표현력이나 문장력이 부족한 탓도 있겠지만 그리하여 어떤 감정들은 약간 왜곡되어 쪼그라들거나 부풀어지기도 합니다.
미래의 내가 과거의 내 기록을 보면 그땐 그랬구나, 하고 어렴풋이 짐작만 할 뿐 현재 지금의 나를 고스란히 담지 못합니다.
그저 최대한으로 표현해 보려고 노력할 뿐이지요.)
여행지에서 봤던 멋진 것들을 올리고 싶어 근질근질할 때도 있었습니다.
어떤 사진을 골라서 올릴까, 이것이 내 포트폴리오라도 되는 것처럼 최상의 사진들을 골라 즐겨찾기 해둡니다.
이걸 메인으로 할까, 이건 넣을까 뺄까... 최대로 올릴 수 있는 10장의 제한이 아쉬울 때도 있습니다.
열심히 고르고 그렇게 하다 하다 약간의 피곤함을 느낍니다.
좋았으면 됐지, 뭘 또 올리나... 그런 감정이 몰려옵니다.
사진이 다도 아니고 사진만 덜렁 올리기엔, 여기서 보고 느낀 것이 너무나 많아 문장으로도 남기고 싶은데, 하지만 그것을 작은 핸드폰 화면 속에서 엄지로 탁탁탁 길게 쓰는 것에 약간의 답답함과 부족함을 자주 겪습니다.
예전엔 여행과 기록이 한 세트로 묶여, 하면 무조건 좋은 그러한 분위기가 있는 듯했습니다.
지금도 약간 그러한 것 같긴 하지만. 개인적인 기록은 사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죠.
하지만 기록도 여행도 남는 것이니까 좋은 것일까요?
SNS에 보이는 멋진 것, 보이는 것은 몇 십, 몇 백장 중 건진 단 한 장의 사진일지라도 그것이 보이는 전부이기에 어떠한 환상이 심어져서 아주 근사하게만 보입니다.
사진 화면에 걸려 치웠을 못난 것들은 보이지 않습니다.
SNS는 기록하기에 아주 좋은 창구이고, 나만 보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보이는 것도 아주 중요한 매체이기에 그래서 더 좋은 것투성이라서, 가만히 잘 있다가도 나는, 나는, 왜 여기에 이러고 있지? 왜 가만히 있는 것 같지? 이 사람들은 왜 이렇게 예쁘고 멋진 곳만 다니는 건지, 갑자기 살짝 배도 아파지는 것입니다.
갑자기 저도 사진첩을 뒤져 내가 얼마나 근사한 것을 봤는지, 했는지, 먹었는지, 만들었는지 막 알리고 싶습니다.
나의 취향과 화각을 은근하게 드러내고 싶습니다.
나도 꾸준히 내 일상을 잘 꾸려가고 있어. 나도 놓치지 않고 이런 것들을 봐, 이런 걸 안다고.
그리하여 아름다운 것들을 담아낸 안목을 뽑아내어 뽐내고 싶습니다.
나 혼자 좋았으면 되는 것을, 그냥 내 일기장에 적으면 되는 것을 굳이 막 보여주고 싶습니다.
요즘은 또 영상의 시대여서 나의 여행과 일상을 영상으로 남기고 싶다가도 아직 그러한 열정이 없음을 깨닫습니다.
부러움 뒤에 따라붙는 피곤함, 열정 없음, 그래서 잘 노력하지 않음, 포기.
다시 또 누군가를 부러워함... 반복.
저의 이런 심리는 잘 없어지지 않으려나요.
부러움이 원동력이기보다 하고 싶음이 커졌을 그때 열정적으로 적극적으로 움직여지려나요.
그런 것과는 별개로 다행히 누군가에게 뽐내지 않아도, 드러내지 않아도 좋을 때가 있습니다.
아니 더 좋기보다 그냥 괜찮습니다.
자랑을 해서 더 좋은 것이라면 맨날 맨날 자랑을 하겠지만 그렇지는 않으니까요.
좋았던 것은 좋았던 것이었고 틀림없는 사실이었으니까 부풀릴 필요도 없고 최상의 사진과 장면을 고를 필요도 없습니다.
내가 얼마나 좋았는지 나는 아니까 괜찮습니다.
언젠가부터 사진이 가득 찬 누군가의 여행기에는 손이 잘 가지 않았습니다.
필름 카메라든, 어느 성능 좋은 카메라든, 능력 좋게 포샵을 했든 너무 다 근사하기 때문이죠.
뭐가 이리도 근사하기만 할까.
여행에도 일상처럼 자질구레하고 시시한 것들이 얼마나 많은데.
난 가보지도 못한 남의 여행기, 궁금하지 않아.
저는 글은 읽지도 않고 사진만 휘리릭 넘겨 보고 그렇게 내 맘대로 짐작해버리곤 조용히 건너뛰거나 책이라면 내려둡니다.
누군가도 나의 여행기가 참 쓸데없고 궁금하지 않고 별 관심이 가지 않을 텐데.
그래서 자랑을 해보려다가 그만둡니다. (참 쓸데없고 피곤한 생각의 소유자...)
따끈따끈하게 막 마친 남도여행은요, 꽤 오랫동안 바라왔던 일이기도 했습니다.
기록도 여행도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라는 것을 알아서, 그래서 자꾸자꾸 미루게 되는 것이 이 두 가지인데.
그래도 저의 경우, 기록도 여행도 해두면 꽤 괜찮은 일인 것 같습니다.
여행은 하면 괜찮음을 넘어 갑자기 만나게 되는 우연을 발견하러 계속 계속 이동, 그래서 그런 노력 덕분에 하루에 좋음이 계속 계속 수시로 찾아오는 것이 아닐까 싶어요.
이번 여행에서 하루 끝에 남기는 기록은 빠졌지만 제 스마트폰에 그때그때 봤던 장면들을 포착한 사진들은 그득합니다.
멋진 풍경들을 보며 가만히 눈에만 담는 그런 것은 아직 잘되지 않아 오 이거다, 이거지 싶은 순간에 자꾸자꾸 스마트폰을 들어 사진을 찍거나 영상을 남깁니다.
제 스마트폰 속에는 저만 볼 수 있는 남도여행의 순간들이 잘 담겨있습니다.
사진첩 속 사진들은 스크롤을 충분히 내렸다 올렸다 할 수 있을 만큼 많고, 며칠간의 기록들이 빼곡히 담겨 있어 그것을 보는 것이 아주 만족스럽습니다.
아직은 혼자 조용히 흐뭇합니다.
이번 여행은 씀의 기록이나 흔적이 굳이 필요 없었는지도 모르고, 그런 것이 다 필요 없을 정도로 좋았는지도 모르고, 그렇게 무언가를 쓰고 붙이고 하는 것을 굳이 하고 싶지 않아서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번 여행에서 하는 것과 하지 않는 것 중 하지 않는 쪽을 택했어요.
하지 않는 것을 하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여행지에서 모아온 것들은 사진 말고도 무언가가 한가득 있습니다.
휴게소에서 먹은 군밤 봉투, 구례에서 챙긴 지역 신문지, 쌍계사에서 주운 나뭇가지, 하동 마을 골목길에서 주운 작은 감 열매, 사고 먹은 영수증, 지역 서점에서 산 여러 권의 책들이 있지요.
이것은 흔적이 되어 제 기록이나 작업의 소스가 될 수도 있습니다.
아직은 이렇게 조용히 혼자 갖고 있다가 별안간 으아아 안되겠다, 싶어 동네방네 자랑하고 싶은 순간도 오겠지요.
그럼 그때 제 SNS에 스윽하고 올리면 됩니다.
저 사실 이런 것들을 보았는데요.. 하고 수줍은 사람처럼 내밀어 보이는 것이죠.
이런 제가 언제는 또 남의 여행기가 좋아 책을 스윽 살 수도 있는 것이고요.
이럴 때도 있고 저럴 때도 있고,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떤가 하며 저는 제게 너그러운 변덕을 부릴랍니다.
남쪽 지방 소도시에서 느꼈던 어떤 적막한 분위기는 요즘의 날씨와 풍경이 다 막아주는 기분이 들었고, 그래서 좋기도 하고 약간은 씁쓸하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여행자는 스치고 지나가는 사람이라 이래도 되나 싶게 고요한 분위기 속에 걱정 같은 건 넣어두고 좋은 것만 취하려고 해서 그 고요가 참 좋기도 했어요.
어쨌든 저는 이런 정도의 엉성한 공개가 마음 편하고, 수줍은 척했지만 이것도 결국 저의 여행기, 자랑 아닌 자랑이 되어버렸습니다. 아이참... (긁적긁적.)
그래서 이렇게 길고 긴 두서없는 문장들은 제 남도 여행에서 흘러나온 이런저런 잡담.
아주 긴 기록을 여기에 남겨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