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약속이 생겼습니다.
신나는 기분에 멋도 조금 내고 싶은 날.
하지만 매년 계절이 바뀔 때에 혼자 묻는 궁금증.
난 대체 작년에 뭘 입고 다닌 거지?
대충 알면서도 행거에 잔뜩 걸려있는 옷을 보고 말합니다.
입을 옷이, 없네 없어.
나는 옷이 아니고 뭐니...
걸려있는 저의 옷들은 어이없어 할 것입니다.
내 기분과 취향에 산 것이 수두룩할 텐데 영 손이 가지 않습니다.
이걸 입어봤다가 벗고 다른 저것을 입어봅니다.
옷을 입은 나를 봅니다.
적나라한 형광등 밑도 아니고 주황색 불이 켜져 있는 화장대 앞에 서 있는 것인데도 썩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어스름한 조명 밑에서도 이렇게 별로인데 햇볕이 내리쬐는 한낮에는 숨김이 없지요. 어떠한 보정도 없을 테니...
다시 옷을 바꿔 입습니다.
그중 제일 나아 보이는 옷을 입고 목걸이를 걸쳐 기분을 내봅니다.
며칠째 쇼핑 사이트를 노려봅니다.
이 땀나는 더위를 극복할 세련되고 유행타지 않고 오래 입을 수 있는 옷을 찾기 위해.
언젠가부터인가 소비를 줄이자, 쪽으로 방향을 틀고 싶었고 그중에는 당연히 옷도 포함이라 있는 걸 최대한 돌려 입자 마음먹었기 때문에 그렇게 저의 옷장은 업데이트가 잘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좋아하는 옷을 입었을 때 기분이 얼마나 경쾌해지는지, 그 살짝 들뜬 기분을 얼마 전부터 다시 느끼고 있어 궁극의 무엇, 아니 차선의 무엇이 또 있을까 하고 열심히 찾아보고 있습니다.
코로나에 걸려 아주 우울했을 때 당연히 집에서 홈웨어만 입었습니다.
홈웨어라고 해봤자 꽤 오래 자주 입어 편함을 넘어 거의 안 입은 듯한 넉넉한 고무줄 바지, 목 늘어난 아무 티셔츠입니다.
이렇게 몇 년을 함께한 후줄근한 옷 말고 저는 갑자기 새 잠옷이 갖고 싶었습니다.
그것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상황에 답답함의 대응으로 뻗쳐버린 욕구였을 테지만, 잠옷 하나쯤은 사도 되지 않나 싶어 정말 오랜만에 위아래 세트로 된 잠옷을 샀어요.
톤 다운된 베이지 컬러에 꽃무늬가 아주 잔잔히 새겨져 있는 보드랍고 순한 잠옷이 도착했을 때 제 기분은 몇 그램 정도 가벼워졌고, 그것을 세탁하여 은은한 섬유 유연제 향이 나는 새 잠옷을 입는 순간 저는 정말 산뜻해졌습니다.
약간 긴가민가 하며 고른 인터넷 쇼핑이 성공했을 때, 그것은 오프라인에서 옷을 직접 입어봤을 때보다 뿌듯함이 더 배가 되는 것 같습니다. (옷 가게에서의 거울과 조명이 우리 집과 달라서인지 옷 가게에서는 분명 예쁘다! 했던 옷도 집에 오면 뭐 괜찮네로 점수가 떨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지요.)
그 잠옷은 저의 최애 잠옷이 되었고, 그 옷을 세탁하려 하면 막 아쉽습니다.
평소엔 잘만 입었으면서 아쉬운대로 주워 입은 듯한, 위아래 따로 노는 잠옷이 갑자기 입고 싶지가 않아져요.
집이니까 당연히 편하면 그만이고, 그래서 버리지 못한 유치한 바지와 목 늘어난 티셔츠들이 여전히 저의 홈웨어지만.
그래도 이제 한 달의 반 정도는 좋아하는 잠옷과 함께 하고 있어요.
그 옷을 입고 있으면 좋습니다.
이 좋음은 좋아하는 옷을 입고 있을 때의 좋음이라 어떤 단어로 설명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옷이 마음에 들고, 또 그 옷을 입고 있는 느낌과 제가 마음에 드는 것이겠죠.
그러나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홈웨어. 나만 아는 홈웨어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제 나만 아는 내 옷에 더 신경 쓰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잠옷을 비롯해 양말, 속옷 같은 것이 그렇지요.
남들 눈에 잘 띄지 않아도 진짜 나만 쓰는 것, 나만 아는 느낌을 소중히 하고 싶어집니다.
지금 있는 후줄근한 저의 옷들은 좀 지쳐 보입니다. 아주 오랫동안 저와 함께해 주어 고마운 마음도 듭니다.
하지만 그 옷을 입은 제가 엄청 예쁘고 사랑스럽지는 않아요. 제 기분도 그렇습니다. 대체로 아무 감흥이 없지요.
이런 기분을 가진 지는 꽤 되었지만 모든 것을 버리고 새로 시작하기는 싫고요.
옷들이 지치고 지쳐 그래서 정말 너무 헤졌다 싶을 때, 혹은 이제 더 이상 지금의 이 편하기만 한 옷들에게 1만큼의 정도 남아 있지 않을 때 보내주고,
차근차근 천천히 새것의 세상으로 가도 될 것입니다.
당장 필요한 것도 아니라 급할 것도 없지요.
그럼 한 달의 반에서 모든 달을 산뜻한 기분으로 지낼 수도 있겠죠.
저는 요즘 틈이 나면 홈웨어, 파자마,를 검색하고 있습니다.
여름이 와서 반소매 티도 검색하고 있고요.
양말은 어딜 가다 마음에 드는 것이 보이면 하나씩 사서 기분전환합니다.
틈나면 검색하고 있는 것이 고작 홈웨어, 파자마, 티셔츠 따위라 이것이 꽤 쓸데없는 시간이라 생각하다가도 이 역시 나를 위한 시간이다,라고 생각해 버립니다.
이 짧은 탐색으로 그 무엇이 나와 함께 몇 년을 보낼 수도 있잖아요.
또 그것이 궁극의 기쁨, 아니 몇 그램의 기쁨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집에서도 기분을 낼 수 있으면서 헤지고 바래도 버리기 아까운 옷이 되길 바라며.
짧게 스쳐가는 인연이 아닌 오래가는 인연이길 바라며.
그래서 요즘의 저는, 경쾌하고 산뜻한 기분을 위해 쇼핑 사이트 앞에서 살짝 애쓰고 꽤 신중해집니다.
거울 앞에 다시 선 저는 또 고민합니다.
링 귀걸이를 사볼까... 예쁜 삔을 사볼까...
아앗... 그만... 제게 무슨 바람이 든 걸까요.
이것은 춤바람도 아니고 멋 바람일까요.
기분 좋은 잠옷 하나가 제게 불어다 준 바람이라고 우겨봅니다.
'멋'의 뜻이 차림새, 행동, 됨됨이 따위가 세련되고 아름다운 것이라는데, 역시 멋쟁이의 삼박자 중에 차림새가 있군요!
여전히 약속을 앞두고 옷장 앞에서 서성이는 저는 올여름을 또 어떻게 나게 될지, 아직 잘 모르겠지만 어떤 옷을 입었든 어깨 펴고 경쾌하게 잘 지내고 싶습니다.
삼박자 고루 갖춘 사람도 언젠가는 되고 싶어요.
결국 오늘은 소비를 싹둑 끊을 수 없는 것처럼 기분 좋은 소비로 인한 작은 기쁨도 쉽게 끊을 수가 없다는 이야기... 였... 다고 갈무리해 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