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제 레이더망을 늘 켜놓고 있다가, 누가 '여기 좋았다!' 하면 그 장소를 냉큼 건져 올리고선 스마트폰 앱 지도에 얼른 표시를 해둡니다.
그 영역은 아주 전국적이어서, 서울을 넘어 전국 여기저기, 제주도까지 뻗어 있습니다.
어느 날 어디를 갈지 어딘가에서 무엇을 찾을지 모를 일이니까요.
가보고 싶은, 식당&카페, 숍, 서점, 갤러리 이렇게 폴더가 구분되어 있고, 식당이나 카페는 빨간색, 서점은 녹색, 갤러리는 보라색 그런 식입니다.
구분과 색이 정확히 딱딱 맞아떨어지지는 않으나 그렇게 제 지도는 갖은 표시로 아주 지저분한 편입니다.
그런 제 레이더망의 지도가 제대로 발휘된 날이 있었습니다.
지난 토요일, 남편과 함께 외출을 했고 그날은 왜인지 기분에 따라 움직이고 싶은 날이었습니다.
커피 한 잔을 기분 좋게 마시고는 갑자기 막국수가 먹고 싶었습니다.
춘천을 갈까 들기름막국수로 유명한 고기리막국수에 갈까 고민하다 두 군데 모두 식사를 하기까지 2시간이 넘게 걸릴 것 같아 갑자기 방향을 휙 틀어 아주 근처에서 후보에도 없던 카레를 먹었습니다.
가까운 사람과는 이런 식일 때가 종종 있지요.
확 달아올랐다가 거품이 훅 꺼져도 쉽게 서로를 원망하지 않고, 실망과 아쉬움은 좀 덜 한 채로 지금 당장 급한 허기를 채우고, 그러려니 하며 서로를 이해해 주는 사이.
그런 날.
그렇게 든든히 점심을 해결하고는 영화를 보러 가기로 했습니다.
제 손안에 있는 스마트하고 지저분한 지도에, 영화관이 있었습니다.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예전부터 표시해둔 예술영화관 '에무시네마'.
별표를 해두고 늘 가야지, 하는 마음은 있지만 굳이 잘 찾아가지 않는 곳이 이런 작은 영화관인 것 같아요.
시간표를 보니 아주 넉넉한 4시 반 타임에 '중경상림'이 기획 상영되고 있었습니다.
오늘 이렇게 기회와 시간이 닿았을 때 가보기로 합니다.
중경상림을 포함해 화양연화, 아비정전, 해피투게더...
왕가위 감독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영화들은 너무나 유명하지만 저는 모두 다 보지 못한 영화여서 익숙하게 아는 장면들만이 아주 어렴풋하게 잘린 필름처럼 있습니다. 그것이 다입니다.
영화 프로에서 자주 언급되어 소개될 때, 홍콩 영화의 왕팬이 이 영화가 얼마나 좋은지에 대해 격앙되어 말할 때, 저는 잘 공감하지 못했습니다.
홍콩에 가본 적도 없을뿐더러 홍콩 영화는 단 한 편도 보지 않았으니까요.
무언가에 흠뻑 빠진 사람을 보는 것은 신기하기도 하지만 대체 얼마나 좋길래 저 사람은 저럴까, 그 기분이 무엇인지 알고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큰 호기심이 동하지 않아 따라 들어가 보지 않았고 그저 가만히 앉아 구경만 했습니다.
영화 소개 프로를 보다 보면 제가 가만히만 있어도 너무나 친절히 설명을 해주고, 그래서 저는 싱겁게 영화 한 편을 다 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영화관에서 온 감각을 열어 큰 화면을 뚫고 나오는 영상과 소리로 접하는 영화는 완전히 차원이 다릅니다.
프로그램으로 영화를 후루룩 보는 것은 남이 떠먹여주는 요플레 같고, 돈을 내고 영화관에서 영화를 감상하는 것은 내 손으로 직접 갈아만든 주스를 음미하며 목구멍으로 들이켜는 것. 그것은 누가 떠먹여주는 것과는 확실히 다른 맛입니다.
아무튼 그렇게 저는, 이번에 영화관에 뚜벅뚜벅 걸어가 첫 홍콩 영화를 중경상림으로 접해보기로 했습니다.
에무시네마는 경희궁 근처에 있고 그 주변으로 난 길을 천천히 걷다 보면 나옵니다.
살짝 경사가 있는 오르막길이지만 주변이 조용한 주택가라 번잡하지 않아 좋습니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 작은 소파에 앉아 대기합니다.
예술영화관, 첫 홍콩영화, 몇 분 뒤에 중경상림을 본다고 생각하니 어떤 대명사 안에 들어가는 것 같아 약간 기분 좋게 설렙니다.
작은 영화관이라 출구와 입구가 같고 앞선 영화가 끝나 사람들이 나옵니다.
(이 전 영화는 에릭 로메르의 '여름 이야기'였고, 이 영화도 마찬가지로 기획 상영되고 있으며 봄부터 겨울까지 사계절의 영화가 있는데 4편 모두 보고 싶습니다.)
제 앞으로 몇몇의 사람들이 지나가고, 상기된 눈동자, 약간의 웅성거림을 바로 앞에서 보고 듣는 그 짧은 시간도 작은 영화관의 절차인 듯 했어요.
상영관에 들어갑니다.
예매 시 좌석을 고를 때 알았지만, 정말 작습니다.
제가 가본 영화 상영관 중 아마 제일 작은 곳인 것 같았어요.
그래서 참 좋더라고요.
인상 깊었던 것은 영화관에 있던 창문.
그 작은 창문을 열어 환기를 하고, 그 너머로는 어느 주택가의 테라스가 보이고 초록이 보이고 하늘이 보입니다.
창문이 있는 영화관이라니, 영화를 좋아하는 어느 영화광의 영화감상방에 조용히 초대되어 앉아있는 느낌이었습니다.
창문이 없다면 아주 깜깜했을 상영관은 작은 빛에 의해 은은한 밝기가 생기고, 단차가 있는 푹신하고 빨간 관람용 의자에 앉아 창문으로 들어오는 밝은 빛을 바라보는데 기분이 살짝 묘했습니다.
영화 시작 몇 분 전, 스태프는 그 창문을 조용히 닫고, 두꺼운 암막 커튼을 칩니다.
본 영화에 앞서서는 몇 편의 영화광고만 할 뿐 길고 긴 시끄럽고 지루한 상업광고는 하지 않습니다.
그런 점이 영화관 경영에는 어떠할지 모르겠으나 관람객 입장에서는 쓸데없는 시간을 줄여주는 것 같아 만족스럽습니다.
비상탈출구, 대피로의 설명도 사람과 영화관의 구조를 인형극처럼 작게 만들어 표현해 주었는데
멀티플렉스의 그것과 달라 색다른 재미도 있었습니다.
그런 하나하나가 아주 작은 디테일도 세심하게 신경 쓰며 놓치지 않겠다는 인상을 주었습니다.
중경상림이 제 눈앞에서 커다랗게 재생됩니다.
좋은 콘텐츠는 단숨에 얼마나 몰입을 하게 하느냐로 판가름 되는 것 같은데, 중경상림 또한 그러했습니다.
시작과 동시에 눈이 또렷해지는 영화였습니다.
영화 소개해 주는 곳에서 몇 번이고 봤을 텐데.
역시나 누가 떠먹여주는 요플레는 인상 깊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제 감각으로 접하는 이 생생한 영화로, 잘린 필름들이 퍼즐처럼 맞춰지고 또렷해집니다.
"내 사랑의 유통기한은 만 년으로 하고 싶다"
"그녀가 떠난 후 이 방의 모든 것들이 슬퍼한다"
같은, 유명한 대사가 어디서 어떻게 나오는지 이제 저는 확실히 알았습니다.
홍콩 영화의 붐이 일었을 때, 저는 그 시기를 놓쳤고, 어렸고, 이렇게 다 커서야 이 영화를 접합니다.
가끔 좋은 걸 다 보고 난 뒤 이렇게 말하기도 하잖아요.
디즈니 안 본 사람 부럽다, 마블 안 본 사람 부럽다. 이런 식으로요.
어떤 경험의 시작을, 너무 좋은 것을 알기 전으로 돌아가 그 기대와 설렘을 다시 느껴보고 싶어서겠죠.
어떻게 보면 저는 이 영화를 이제야 보게 되어 좀 다행스럽기도 했습니다.
취한 것 같은, 정신없는, 밑도 끝도 없는, 느낌과 감성으로 충만한 이 영화를 제가 지금보다 어렸을 때 봤다면 지금처럼 좋았을까요.
뭔지 모르지만 좋아하는 척했을지도 몰라요.
음악과 분위기로 압도하여 영화에 취하게 하는 이 기분은 지금이라서 느끼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므흣한 미소를 띠며 상영관을 나왔습니다.
중경상림의 OST, '캘리포니아 드림'과 '몽중인'이 머릿속에 맴돌고, 바로 집에 들어가기가 싫습니다.
괜히 길거리를 두 팔 벌려 뱅뱅 돌며 걷고 싶어집니다.
영화관을 나오고도 여운이 그득하게 남은 것이죠.
코로나로 2년여 동안 영화관을 멀리했고, 그 사이 노트북으로 다양한 영화를 접하긴 했지만 역시나 뭔지 모를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쉽게 가시지 않는 영화를 보고 난 뒤 역시 영화는 영화관에서 봐야 한다는 결론이 이렇게 다시 한번 들었습니다.
이제 거리 두기도 많이 완화되었고, 좋은 영화들이 속속들이 등장하고 있어 이제는 조금씩 가벼운 마음으로 영화관을 찾고 있습니다.
저는 별표 해 둔 에무시네마라는 곳을 가보았고, 이제 뭘 좀 아는 사람 같은 근사한 기분에 사로잡혀 어떤 영화를 하는지 스케줄표를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제 관심의 레이더망으로 잡아둔 별표가 어느 주말 아주 기특한 역할을 했고, 이렇게 값진 장소를 알게 되어 저는 요즘 그것에 대해 꽤나 기뻐하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