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이유는 바로바로, '정동진독립영화제'를 보기 위해서였어요.
이 영화제를 알게 된 것은 2015년.
강릉 여행길 어느 가게에서 저는 우연히 포스터 한 장을 보게 되었습니다.
'제17회 정동진 독립 영화제'
손글씨로 쓰인 로고와 함께 민트색 하늘, 하얀 구름, 분홍색 파도, 노란 모래사장 위엔 손을 잡고 나란히 걸어가는 사람들의 모습, 귀여운 기타, 하늘을 나는 갈매기, 놓치지 않고 포착한 미역 같은 꽃들이 그려진 그림.
저는 처음 본 영화제 포스터 앞에서 잠깐 멈춤 한 뒤, 그 귀여움을 찍어두었습니다.
마음이 그곳으로 훌쩍, 그렇게 나도 그들의 손을 잡고 홀홀 떠나고 싶은 포스터였고 그때부터 이곳을 점찍어두고 언젠간 꼭 가보리라는 마음을 품었어요.
그 뒤로 몇 번인가 영화제를 가보려고 시도했지만, 극성수기인 여름 휴가철에 정동진에 축제를 보러 간다는 것은 대단한 계획과 결심과 만만찮은 비용이 서지 않으면 안 되는, 홀가분한 마음만으로는 쉽지 않아 아쉽게도 매번 포기를 했었습니다.
그렇게 몇 해, 아는 듯 모르는 듯 영화제를 잊고 지냈고 2022년 무료하던 어느 여름날, 저는 이맘때의 그 여름 축제가 번뜩 떠올랐습니다.
찾아보니 몇 주 뒤.
정동진독립영화제는 자라고 자라 벌써 24회가 되어 있었고, 올해에는 이전과 같은 행사가 열린다는 공지를 보았습니다.
(코로나19가 심했던 지난 2년 동안은 부득이하게 관객 수를 제한하고 유료로 운영했다고 합니다. 올해엔 누구나 자유롭게 운동장에 들어와 영화를 무료 관람할 수 있는, 팬데믹 이전 시스템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 것.)
행사는 8월 첫째 주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 3일간 열리지만, 우리 부부는 토요일에 갔다가 일요일에 돌아오는 1박 2일의 일정으로 하기로 했어요.
숙소는 따로 잡지 않아도 되었어요.
이제 우리에겐 차가 있었고, 요즘 유행이라는(한참 전부터였겠지만...) 차박이란 것도 이번 참에 경험해 보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설레는 마음에 잠도 많이 못 자고, (여행 전날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선잠을 자는 사람이 저입니다.)
새벽 6시도 안 돼 일어나 전날 밤 미뤄둔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고, 누룽지를 끓여먹고 설거지를 마치고, 식물에 물을 주고, 짐을 챙기는 사이 벌써 7시 반이 되었습니다.
부랴부랴 출발했는데, 그 시간은.. 휴가철 여행길엔 한참 늦은 출발이었지요...
점심 메뉴를 찍어둔 사진을 보니 오후 1시가 넘은 시간.
여행지에 도착해 한 끼를 먹기까지는 5시간이 훌쩍 넘게 걸린 것 같습니다.
배고픔에 지치고 지쳐 점심으로 먹은 막국수는 탈이 나고 말았고, 올해 경험한 더위 중 최강의 더위를 맞이해 어이없게도 허허허 웃음이 났습니다.
더위를 맞으러 온 느낌이었어요.
그래도 여행지에서의 시간은 이상하게 잘 흘러갔어요.
영화 상영은 8시이지만, 행사 입장은 6시이기 때문에 행사장에 마련된 여러 부스에서 먹을 것, 살 것들을 구경하고 분위기를 느끼려 일찍 행사장으로 가보기로 했습니다.
영화제에 온 것은 처음이라 무엇을 어떻게 즐겨야 하는지 모른 채, 그저 들뜬 마음만 가지고 축제가 열리는 곳으로 갔습니다.
즐기러 온 사람들의 가볍고 경쾌한 발걸음, 옷차림, 웃음소리, 떠들썩한 분위기가 축제장 근처에서부터 벌써 전해졌습니다.
축제가 열리는 곳은 강릉 정동초등학교.
초등학교에서 열리는 축제는 참 색다른 기분을 주었어요.
이렇게 어른이 되어서는 초등학교 교문을 넘나드는 일이 잘 없으니까요.
그 교문으로 들어가는 순간, 축제의 장에 들어가고, 내 마음은 어린이가 되어버리는 것일까요?
학교 안을 들어서니 바닥엔 빨간 카펫이 깔려있고, 스태프분들이 비눗방울로 관람객을 환영해 주고 있었습니다.
비눗방울은... 너무 아름답고 사랑스럽잖아요.
다 커버린 내게 그 누구도 이 사랑스러운 물방울을 환영의 의미로 퐁퐁 귀엽게 쏴주지 않으니까요.
저는 감격하며 와아! 하며 환호했습니다.
저녁 6시가 넘었어도 더위는 꺾일 기세 없이 여전히 후끈했지만, 기분만큼은 끝내주었습니다.
온몸이 끈적거리고 얼굴엔 땀이 송골송골 맺혔는데 제 입은 크게 웃고 있었어요.
행사장 입구에 마련된 포토존에서는 스태프분께서 적극적으로 사진도 찍어주셨습니다.
카메라 렌즈 근처에서 비눗방울을 쏘아주며 연출을 해주는 열정까지 보여주셨어요.
이토록 진심 어린 분들이 행사를 진행해 주고 있다니...
축제 처음 온, 땀 흘리는 어리둥절 관람객 1과 2일뿐인데... 이렇게 환대를 받아버리다니.
제대로 된 축제는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저는 입구에서부터 벌써 감격하여 입장부터 좋아져 버렸습니다.
남편은 너무 더워 맥주를 사 벌컥벌컥 마셨고, 저는 영화제 티셔츠를 사고 싶어 사람들 틈에서 발을 동동 굴렀습니다.
신남의 동동거림.
마음이 열리고 지갑이 열리는 날인 것입니다.
사이즈에 맞는 티셔츠를 각각 사고, 이것을 과연 언제입을 것인가 즐겁게 고민합니다.
내년에 이 티셔츠를 입고 다시 오는 즐거운 상상을 합니다.
함께 홍보하고 있는 부스 중 한 곳은 '논산 한옥마을 영화제'.
팔로우를 하면 모기퇴치 팔찌를 준다기에 덥석 팔로우를 하고 형광 주황색의 팔찌를 얻었습니다.
이런 형광색 팔찌를 팔에 차버리니... 이제 정말 축제에 들어온 기분과 차림이 갖춰진 것만 같습니다.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널찍한 운동장에 의자와 상영 스크린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자리를 잡고 앉습니다.
신나는 박자의 음악이 나오고, 팔찌에서는 진한 계피 향이 나오고, 그리고 양옆에서는 쑥불의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습니다.
매캐한 이 연기가 뭐지, 하고 궁금했는데 그것은 모기를 퇴치하기 위한 스태프분들의 정성 어린 노고였어요.
알고나니 그 연기는 든든하고 진한 풀향기로 다가와 분위기를 그윽하게 만들어 주는 것 같았고, 그 덕분에 버물리의 쓰임이 아주 덜했던 것 같습니다.
여름밤의 공기와 풍경, 피부에 닿는 온도와 습도.
눈 귀 코 입에 들어오는 다채로운 자극.
그렇게 온 감각이 모두 열린 채로, 느긋하게 상영을 기다립니다.
어스름했던 했던 시간은 점점 짙어져가고, 8시가 되었습니다.
여름날의 풍경이 담긴 기차 소리, 파도 소리, 풀벌레 소리, 카메라 셔터 소리, 그리고 정동초등학교를 비추는 트레일러 영상이 나오며 본격적인 영화 상영을 알립니다.
새삼 제가 이 공간에 앉아있는 것이 신기하고 놀라웠습니다.
내가 여기에 오다니, 내가 여기에 있다니!
이런 생각이 문득문득 들었습니다.
저야말로 영화 속에 있는 것 같아서요.
너무 좋아서 막상 영화를 시작하고는, 상영 내내 조용히 흥분했습니다.
너무 큰 기쁨이 호들갑 부려 날아가 버릴까 봐 혼자 큰마음을 안고 조용히, 그렇지만 어떻게 해도 감추지 못하는 상기된 표정으로 있었습니다.
그날은 정말 뭔가 좀 달랐습니다.
계속 붕 떠 있는 기분이 들었거든요.
시간이 지나면서, 깜깜한 밤이 되었습니다.
뜨거웠던 공기는 정말 신기하게도 선선해졌습니다.
12시 방향에 있던 달은 점점점 오른쪽으로 기울어져 갔습니다.
영화를 보다가 하늘을 올려다보면 별이 보이고, 저기 저편에서는 기차가 달립니다.
축제 안의 사람들은 한마음이 되어, 함께 웃고 함께 웁니다.
활짝 열린 마음이 준비되어 있어서인지 웃긴 장면에서는 더 크게 웃는 것 같고 슬픈 장면에서는 더 슬퍼하는 것 같았어요.
저는 그렇게 안전한 공동체 안에서 마음 편안히, 기쁘게 머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화의 한 섹션이 끝나면 GV(Guest Visit)가 있어 감독과 배우가 무대에 나와 관람객과 만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런 시간도 참 특별하게 느껴졌어요.
그날 준비된 모든 영화는 새벽 1시쯤 끝이 났습니다.
초저녁엔 괜찮았지만, 밤이 깊어져 가면서는 영화의 소리가 더 쩌렁쩌렁 울리는 듯했고, 야외에서 열리는 영화제라 그대로 노출되는 소리가 소음이 되지 않을까 싶어 주변의 집들에게 마음이 쓰이기도 했지만, 모두 동의하에 그저 함께 즐겨주고 계셨으면 좋겠다는 관람객의 이기적인 마음을 함께 품기도 했습니다.
영화를 보고 나오는 길, 영화제 이벤트엔 땡그랑동전상이란 게 있는데, 감명 깊게 본 영화에 관객들이 직접 동전으로 투표를 하는 것이었어요.
저는 지갑에 있는 동전을 탈탈 털어 거의 모든 영화에 투표를 하고 나왔습니다.
교문을 나온 뒤에도 저는 여럿 무리를 지어 오늘 분위기는 어땠고 영화는 어땠고 밤새 이야기하며
흥분의 장을 잇고 싶었으나, 눈 비비며 버티고 있는 남편의 손을 잡고는 조용히 오늘 숙소인 차로 돌아갔습니다.
너-무 좋았던 여름날의 축제.
24회의 축제를 사람으로 치자면 어엿한 성인이 된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이렇게 오래가고 인기 많은 이유를 알겠습니다.
내가 좋다고 느낀 것을 다른 사람도 좋다고 느꼈겠지요.
저는 이 축제를 이제라도 만나게 돼서 진심으로 기쁩니다.
또렷하지 않은 몇 해의 여름이 그저 아쉽기만 했는데, 2022년 여름에는 아주 또렷한 기억이 새겨졌습니다.
심심한 여름은 이제 제겐 없을 것이라고, 한여름밤, 나는 이제 정동진에 가서 이 축제를 달갑게 즐기겠노라고 결심하며 내년의 여름을 바라봅니다.
끈적끈적했던 열기와 땀방울은 사라졌지만 제 안에 조용한 흥분의 불씨가 아직도 꺼지지 않고 살아 있습니다.
이렇게 잘 간직하고 있다가 다음 해엔 조금 아는 기분으로, 또다시 즐겁게, 반가운 그 교문을 폴짝폴짝 넘나들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