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얗게 빈 문서와 깜박거리는 커서가 아무렇지 않을 때도 있지만, 저는 지금 빈 문서와 커서 앞에서 한참 동안 버벅대고 있습니다.
한 주를 쉬었고 그래서 제게는 글감과 소재가 평소보다 더 많아야 하는데 썼던 글을 지우고 지우고 또 지우고, 메모장에 흩어져 있던 단어들을 훑어봐도 도통 어떤 것으로 글을 써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런 일이 반복될 때 저는 살짝 두렵습니다.
무언가를 지속적으로 하다 틈이 생기고, 그 일을 다시 시작하게 됐을 때 분명 내가 했던 일인데도 망설여질 때가 있습니다.
자전거 타기, 오랜만에 만드는 요리 같은 것이 그렇습니다.
일직선으로 되어 있는 두 바퀴를 페달과 핸들로 안정을 잡기까지, 내가 이걸 어떻게 만들었더라 하며 기억을 떠올리기까지 시간이 조금 필요합니다.
글을 쓸 때에도 약간의 버둥거림과 예열이 필요하다 생각하지만, 그 시간이 언제나 오래 걸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몇 주 동안 제 기분은 가라앉아 있습니다.
기쁨과 행복이 매일의 기본값이 아니라는 생각은 하지만, 그래도 요즘은 이름 모를 답답함과 불안함이 평균값보다 더 아래로 내려간 느낌이에요.
내 기분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온전한 나일 텐데, 내가 나를 어쩌지 못하는 나날이 계속될 때에는 조금 힘이 듭니다.
며칠 동안 붙들고 있었던 책은 안희연 작가님의 '단어의 집'입니다.
그중 '네온'이라는 챕터가 너무 좋아서 몇 번을 다시 읽었어요.
몇 주째 한 문장도 쓰지 못했다.
라고 시작하는 글인데요.
좋았던 부분을 여기에도 옮겨 봅니다. (이 챕터의 모든 글을 옮기고 싶지만ㅜ)
지금 내 몸은 뭔가를 쓸 수 있는 몸이 아니라고.
나는 지금 '무색무취무미'의 상태를 통과 중이며, 이토록 무색무취무미한 시간을 다시 생기 있고 빛나는 무언가로 탈바꿈시키기 위해서는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리라고.
(…) 그러다 '네온'이라는 단어를 만났다.
네온은 '새롭다'는 뜻의 그리스어인 'neos'로부터 유래하였고 맛, 색, 냄새가 없는 안정된 기체라고 한다.
네온사인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공기를 분별 증류하여 네온이라는 기체를 추출해야 하며, 그렇게 얻은 네온을 다시 유리관에 넣어 방전시키는 과정이 필요하다. (…)
나와 네온에게는 무색무취무미의 상태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런데 어떤 방전은 한 사람을 거대한 웜홀에 빠뜨려 아무것도 쓰지 못하게 하고 어떤 방전은 놀라운 주황빛이 된다. (…)
빈도와 강도는 다를지라도 우리는 누구나 무색무취무미의 시간을 겪는다. (…)
네온의 방전은 빛이 된대요. 방전에도 쓸모가 있어요.
그러니 방전되세요! 아예 두꺼비집을 내리자고요!
-안희연, <단어의 집>, 한겨레출판, 213-217p
아니 내가 뭘 했다고 방전이라는 말을 내 몸에 갖다 쓸 수 있을까 싶다가도, 이렇게 나를 모르는 누군가가 일어나지 말자고, 방전되자고 외쳐주는 책에 이상하게 위안을 받았습니다.
매일매일을 열심히 살아도 부족한 저임을 누구보다 잘 알지만, 누워 있지 말고 일어나서 뭐라도 하라고 아우성 대는 것보다 지금 저는 이렇게 함께 허우적대는 이야기에 위로받고 오히려 힘을 얻습니다.
기분과 기운은 세트로 함께 움직입니다.
좋은 기분과 좋은 기운은 사이좋은 친구로 거의 같이 다닙니다.
서로 잘 끌어줍니다. 그 반대도 그렇죠.
그렇게 기분과 기운은 끼리끼리 모입니다.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 저를 차지하고 있는 기분이 나쁘다면 그 녀석이 하루의 기운을 지배하지 않게 노력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엉망이고, 그래서 좀 괴롭고.
안희연 작가님처럼 저도 무색무취무미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도요.
요즘의 저를 그렇게 정의해 버리니, 오히려 조금 후련해지는 것도 있었습니다.
방전을 하고 있는 와중에도 찾아오는 불안이 반갑지는 않지만, 즉각적으로 제 기분을 올려주는 것을 찾아 곁에 둡니다.
무색무취무미의 모든 무를 유로 바꾸어버립니다.
좋아하는 색색의 종이들을 눈에 담으며 작업합니다.
라벤더 아로마 오일을 나무토막 위에 톡톡 떨어트려 향을 만듭니다.
바삭바삭한 치아바타에 달콤한 자두 쨈을 발라 한 입 먹습니다.
흩어진 색종이들을 바라보고 작은방에 퍼지는 은은한 향을 맡고 바삭한 한 입에 미소 짓습니다.
유색유취유미.
그것들은 모여 언뜻 유의미하게도 보입니다.
그 만족의 시간은 아주 짧게 끝나더라도,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걸 하기로 합니다.
욕심내지 않습니다.
어떤 것들은 욕심과 욕망으로 괴로울 때가 참 많으니까요.
추석 연휴와 한 주의 휴재가 저를 더 헤매는 인간으로 만들어 버린 걸까요?
사실 생각해보면 그 와중에 참 많은 일들이 저를 스쳐 지나갔습니다.
저도 네온처럼 다시 빛날 수 있을까요?
풀리지 않는 글처럼, 무색무취무미의 이 시간도 오래 걸리지 않았으면 하고 바랍니다.
무에서 유로, 또는 그 모든 유가 무로 바뀐대도 이런 말을 저는 반복할 것입니다.
할 수 있는 걸 하자, 할 수 있는 걸 하자, 할 수 있는 걸 하자.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라도 잘 하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