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에 다녀왔습니다.
많은 일이 그렇듯 아직도 처음 경험해 보는 일이 많네요.
어른이 되고서는 배를 타고 제주에 가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어요.
긴 여행에 앞서 저는 걱정과 불안이 태산처럼 커져서 여행 전날에는 피곤해도 잠이 잘 오지 않아요.
특히 그것이 처음 해보는 일이라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어떡하지, 괜찮을까, 하는 걱정이 설렘을 크게 누르는데 그것이 잘 고쳐지지 않아요.
평소에는 잘 자던 잠을 여행 전날엔 거의 자는 둥 마는 둥 하여 꼴딱 새우고.
그래서 좋은 거라면... 음... 저는 여행에 앞서 지각하는 일이 잘 없지요.
역시 제주도 여행을 앞둔 그 전날 밤에도 저는 잠을 꽤나 설쳤고, 저에 비해 말끔하게 자고 일어난 남편과 함께 새벽 5시 반쯤 집을 나섰습니다.
차를 배에 싣고 가 제주도에서 마음 편히 여행을 할 계획을 세웠으므로, 우리는 차를 끌고 완도항까지 가야 했어요.
평소 지명만 알고 지내던 익숙하고 낯선 도시명을 휙휙 지나 완도에 도착했어요.
완도에서 먹은 여행지에서의 첫 끼, 전복과 소라가 듬뿍 올려져 있는 미역국을 먹었는데, 미역이 너무나 보드랍고 맛있어서 참 흡족했습니다.
특히나 반찬으로 나온 매실장아찌가 생각나는데요.
자주 접하던 빨간 양념이 아니라 초록의 매실색이 그대로 드러난 처음 본 매실장아찌였는데, 새콤한 살구맛이 나서 비타민C를 와구와구 씹어먹는 느낌이었어요. 아삭하며 새콤달콤한 맛이 입맛을 살려주니, 얼굴을 찡그리면서도 야금야금 아껴 먹은 기억이 납니다.
이렇게 글을 쓰다 보니 침이 고이네요.
저는 차를 타면 잘 조는데, 그것도 멀미의 일종이라는 걸 아주 뒤늦게야 알았어요.
특히나 물의 파동과 기계의 울림이 합쳐져, 내내 둥둥둥 울리는 배는 차보다 더 적응이 잘되지 않아 제게는 좀 힘든 이동 수단이에요.
그래서 출발하기 전 낚시하는 사람들이 먹는다는 멀미약을 사서 야무지게 챙겨 먹었습니다.
제주 여행을 가기 전 고심하여 챙겨간 책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입니다.
그 책엔 '실감'이라는 단어가 꽤 자주 나옵니다.
뛰어난 소설이나 뛰어난 음악도 그것과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온천물과 가정용 목욕물, 온도계로 재보면 똑같은 온도라도 실제로 맨살을 그곳에 담가보면 차이를 알게 됩니다. 피부로 실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실감을 언어화하기는 어렵습니다.(…)
만일 독자가 내 작품에서 온천의 깊은 따끈함 같은 것을 맨살의 느낌으로 조금이나마 감지해 준다면 그건 참으로 기쁜 일입니다. 나 역시 줄곧 그런 '실감'을 추구하며 수많은 책을 읽고 수많은 음악을 들어왔으니까.
다른 무엇보다 자신의 '실감'을 믿기로 하십시다. 주위에서 뭐라고 하든 그런 건 관계없습니다. 글을 쓰는 자로서도 또한 그걸 읽는 자로서도 '실감'보다 더 기분 좋은 건 어디에도 없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현대문학, 166p, 170-171p
이 페이지 외에도 책에 툭툭 실려 있는 이 실감이라는 단어를 여행 내내 마음에 두게 되었어요.
저희가 탄 배는 낮에 출발하는 배라 로비 같은 곳에서 하늘과 바다를 볼 수도 있었겠지만 저는 그런 건 꿈도 못 꾸고, 우리가 예약한 다인 침실칸으로 바로 들어갔지요.
의외로 침실칸은 아주 아늑해서 나름 즐거운 체험이었지만 그것은 잠시뿐이었고, 금세 노곤해져서 베개에 머리를 베고 누웠습니다.
그렇게 누우니 귀와 머리에 울리는 진동이 세게 느껴지고 당연히 온몸에까지 전해지는 끊임없는 배의 울림이 있었어요.
책 같은 건 언감생심 읽을 수도 없었고 모로 누워 멍하니 카드게임을 몇 판 하며 시간을 보내다가 저는 어느새 스르르 잠에 들었습니다.
걱정했던 일 안에 들어오면 오히려 팽팽하게 조였던 긴장의 끈이 스르르 풀려버리는 일, 막상 해보면 별일 아닌 일.
생각보다 안전한 일, 충분히 해볼 만한 일, 괜찮은 일.
그런 것을 저는 또 한 번 배 안에서 경험했습니다.
배 안에서 느꼈던 저만의 실감.
둥둥둥. 징징징.
자는 동안 저는 그 실감을 안고 제주도로 향했습니다.
이번 제주도 여행은 12시 방향에 있는 제주항에서 출발.
서쪽, 남쪽, 동쪽으로 돌아 다시 제주항으로 돌아오는 제주도 한 바퀴 여행을 계획했습니다.
저는 이번 여행에 큰 욕심이 없었기 때문에 제가 보고 듣고 먹고 느끼는 모든 것이 덤처럼 느껴졌어요.
길게 잡은 여행 일정의 느긋함과 욕망 없는 여행이 그런 여유를 만들어 준 듯해요.
8박 9일 여행 중 둘째 날을 제외하곤 모두 숲을 보러 갔어요.
한라수목원, 치유의 숲, 절물자연휴양림, 사려니숲, 비자림, 교래자연휴양림, 거문오름까지.
지금도 많이 생각나고 그리운 건, 역시나 제주의 자연입니다.
자연스럽게 뻗은 나무의 수형, 엄청난 크기의 그루터기, 거친 돌 틈 사이로 자라나는 풀, 색과 모양새가 다른 수많은 이끼, 나무 기둥을 딱딱딱 두드리고 있던 딱따구리, 그리고 자주 마주쳤던 눈 맑은 노루와 고라니, 그 안에서 느낀 시원하고 푸릇한 기운과 향긋하고 깨끗한 숲 냄새.
여기선 쉽게 볼 수 없던 자연의 풍광들이 너무나 아름다웠고, 거칠고 제멋대로인 듯하지만 그 안에서의 조화로움을 보는 것이 무척이나 행복했고, 장소를 바꿔가며 만나는 숲들의 다채로움이 정말 대단하게 느껴졌습니다.
잘 닦인 숲길부터 거친 숲길까지 다양한 숲을 다니며 많은 걸음을 숲 안에서 보냈습니다.
이번 가을 제주 여행에서 또 한 번 느낀 것은, 제주에 올 때마다 제 마음은 참 순해진다는 것이에요.
특히 남과 비교하지 않는 마음이 참 편안하더라고요.
온갖 소식과 정보가 넘쳐나는 SNS나, 시선을 사로잡는 유튜브 같은 것에 눈길이 잘 가지 않아 자연스레 스마트폰을 멀리하게 되고요.
여행으로 이어지는 일상생활은 특별해지고 또 아주 단순해집니다.
푸르고 광활한 자연을 눈에 담고 온 날엔 나만의 '실감'으로 인해 하루가 충분히 잘 채워졌다는 느낌이 듭니다.
여행길이어서 고작 하루에 하는 것은 오늘 뭐 할까, 뭐 먹을까 하는 아주 즐겁고 가벼운 고민이며, 흘러가는 대화들은 오늘 날씨가 어떻고, 바람이 어떻고, 구름 모양이 어떻고, 하는 그런 이야기들이니 심각할 것도 무거울 것도 없습니다.
실생활에서는 이런 이야기로만 절대 굴러가지 않지만, 여행지에서만큼은 이런 힘들이지 않는 이야기로 굴러가는 하루하루가 즐거울 따름입니다.
하루 일정을 마치고 따뜻한 물에 몸을 씻을 때, 제주의 물이 아주 부드럽다고 느낍니다.
여기서 오래오래 지내면 제 예민한 피부는 다 낫고 건강해질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평소보다 씻는 시간을 매끄럽게 더 연장합니다.
개운하게 씻고 나오면 아주아주 깜깜한 밤입니다.
그렇게 씻고 나와 잠옷 바람으로 일기를 쓰고 있으면 모든 것이 잠든 듯 주위가 무척이나 고요합니다.
오늘 먹고 보고 산 것들의 영수증을 모아 일기장에 붙이고, 하루에 무엇무엇을 했다는 사실의 기록만 적어도 2페이지가 훌쩍 넘어가는 일기로 하루를 마감합니다.
그 시간이 너무나 조용하여 잘 적응이 되지 않지만, 오히려 이것이 진짜 밤의 분위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자연의 소리도, 인공의 소리도 모두 멈추어 버린 밤.
모두가 잠을 자며 휴식을 취하고 또 다른 내일을 준비하는 밤의 시간.
여기선 늦은 밤에도 가로등 불빛으로 사위가 아주 환한데요.
제주에서는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떠도 어둠의 정도 차이가 많이 나지 않습니다.
아주 깜깜하지요. 그래서 살짝 무섭기도 합니다.
그럴 때엔 내일을 기대하며 눈을 꼭 감아버립니다.
그러다 어느새 잠이 들어버리고.
알람이 없어도 조용히 눈이 떠지는 아침이 좋았습니다.
개운한 날도 개운하지 않는 날도 있었지만 기분 좋은 새소리는 어디에서나 들렸고요.
깨끗했던 숙소는 우리의 물건들로 너저분해지지만, 하루하루의 숙소가 여기선 우리의 집입니다.
천천히의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든든한 먹을거리로 배를 채웁니다.
어느 때는 시원한 바닷바람이, 어느 때는 상쾌한 숲의 공기가 큰 숨을 쉬게 합니다.
맑은 날도 흐린 날도 모두 괜찮았습니다.
참으로 평안했던 제주에서의 매일매일.
그렇게 8번의 아침과 낮과 밤을 제주에서 무탈하게 잘 보내고 돌아왔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