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바꿀 수 없을 땐 환경을 바꿉니다.
그렇지만 그런 마음도, 바뀌고 싶은 에너지가 있을 때나 가능한 일입니다.
저는 작업도 집에서 하기에 살림과 작업이 합쳐진 집에서 가장 오래 머뭅니다.
매일 성실하게 쌓이는 먼지가 지겹고 못나 보여도, 정리하려고 마음먹은 지가 언젠지 모르는 수북한 종이 더미 같은 것을 보면 답답하지만, 당장 먹을 밥을 차리고,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하고, 수납장에 수건이 떨어지지 않게 두는 것만도 대견하게 느껴질 때가 있어요.
제 눈앞에 보이는 급급한 것들만 해치우면서 그렇게 아마 몇 주를 보냈던 것 같아요.
사람들은 어찌 그렇게 잡지 속처럼 사는 건지 참 대단하게 느껴집니다.
내가 그래놓고도 손 데기 싫은 지경에 이른 작업방에 들어오면 한숨이 나왔습니다.
작업할 일이 생기면 기다란 책상 구석 그나마 남겨진 작은 공간에서 쪼그려 작업을 하거나 그것도 모자라면, 바닥에 내려가 웅크리고 작업하는 저를 보면서, 이제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싶었습니다.
내가 좋아하고, 내 에너지를 쏟아붓고 싶은 작업의 공간을 이렇게 두면 안 되겠다는 자각이 몹시 세차게 들었어요.
다행히도 제게는 어떤 시간이 흘렀고, 그 시간 동안 자연스레 에너지가 충전되었기 때문에 움직일 힘이 났습니다.
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청소를 해야 할지 몰라 모른체하고 있던 작업방을 청소하기로 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어느 날 갑자기처럼 보이지만 어느 정도는 계속 생각을 해왔던 것이고, 그저 그날이 몸과 마음의 에너지가 일치된 날인 것입니다.
이렇게 에너지가 저를 덮쳐올 때 그것을 받아낼 힘이 있고, 무언가 하고 싶은 마음을 무시하고 싶지 않은 때가 된 것이죠.
사실 저는 약간 두렵기도 했습니다.
네모난 상자에 검은 천이 덮인 것처럼, 그 천도 알고 보면 내가 진작에 덮어둔 건데 그것엔 이미 먼지가 한가득 쌓여 있어서 건드리기가 싫었고, 또 그 가려진 상자에 내가 넣어둔 것이 무엇이었는지 짐작으로만 아는 기분이 그다지 즐겁지가 않았습니다.
귀찮음으로 방치된, 그래서 더 막막해져 버린 작업방 안에서, 그렇지만 저는 그 수많은 감정을 뚫고 에너지를 동력 삼아 팔을 걷어붙였습니다.
할 수 있는 지점부터 시작해 방 안의 영역을 차차 넓혀가며 이곳저곳을 모두 정리하고 청소했습니다.
볼품없이 먼지만 먹고 있던 검은 천은 알고 보면 아주 쓸모 있고 개성 있는 천이었고, 덮어둔 상자 안에는 제가 모아놓은 소중한 꾸러미들이 가득했다는 걸 발바닥이 아프도록 청소를 한 후에야 조금이나마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청소를 얼마 동안 쉬지 않고 했나 봤더니, 한 3시간쯤 됐을까요.
저는 이 작업방에 고작 3시간을 내지 못해서, 몇 주간을, 아마도 몇 달간 이렇게 지냈다고 생각하니 그동안 쌓인 나의 시간과 에너지는 어디로 간 건가 싶어 약간 허전한 기분도 들었습니다.
하고 나면, 뿌듯하고 개운해져서 진작할 걸 하는 마음이 들지만 평소에 조금씩 진작,이라는 게 마음처럼 쉽지 않을 때가 있으니까요.
잊고 지내던 습관달력도 만들어 프린트했습니다.
습관달력이 무엇이냐면, 몇 년 전 남편과 함께 만든 각자의 프로젝트인데요.
각자 지키고 싶은 3가지 정도의 목록을 '하기'와 '하지 않기'로 나누어 한 달 동안 잘 보이는 곳에 붙여두고, 하루에 하나씩 동그라미 치며, 혹은 스티커를 붙이며 하루치의 성공과 실패를 맛보는 것입니다.
예전에 '하기' 안에 있던 것은, 매일 일기 쓰기, 프랑스어 한 단어 외우기, 30분 스트레칭 같은 것이 있었고, '하지 않기'에는 봉지 과자 먹지 않기 같은 것들이 있었습니다.
그중에 지금까지 습관으로 자리 잡은 것이 하나 있다면, 단 하나, 일기 쓰기입니다.
이제 일기 쓰기는 신경 써서 지켜내고 싶은 의무의 영역을 벗어나 자연스레 잡힌 습관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꾸준히 무언가를 하다가, 한 달 안에 있던 동그라미와 스티커가 가뭄에 콩 나듯 드문드문 붙어 있을 때, 의욕 같은 것은 매우 매우 시들해집니다.
다음 달부터! 하며 호기롭게 떼어놓은 이번 달의 종이는 그렇게 언젠가부터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 잊고 있던 습관 달력이, 다시 부활했습니다.
타이탄의 도구들이란 책을 보니까 이런 문장이 있더라고요.
매트는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습관에 대해 묻는 내 질문에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매일 잠자리에 들기 전 하는 '팔굽혀펴기 1회'를 꼽았다.
그렇다, 딱 한 번이다. 그는 말한다. "아무리 늦게까지 일을 했더라도, 또 세상이 아무리 어수선하더라도 팔굽혀펴기 한 번도 못할 만큼 힘들기는 불가능하다. 목표와 계획을 세울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변명의 여지를 없애는 것'이다. 그래야 달성할 수 있다. 일단 쉽게 쉽게 습관이 들게 하는 것이 핵심이다. 습관이 되고 나면 두 번, 세 번, 열 번으로 늘려가도 어렵지 않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팀 페리스 지음(박선령, 정지현 옮김), <타이탄의 도구들>, 토네이도, 91p.
이 문장을 보고 저는 오랜만에 다시 목록을 만들었어요.
팔굽혀펴기 1회 같은, 저만의 아주 작은 목표를요.
그것은 아주 유치하고 소박해서 웃음이 나올지도 모를 것들이에요.
'도라지 배즙/레모나 챙겨 먹기, 허벅지 5회 들어 올리기, 새벽 1시 전에 자기'랍니다.
(이 글을 쓰며 주방으로 가 레모나 한 포를 챙겨 먹고 왔습니다.)
다 써놓고 보니, 제게는 이 세 가지가 먹기, 움직이기, 자기 같은 아주 단순한 것들이더라고요.
생활에서, 그리고 지금 제가 지켜내고 싶은 것은 가장 단순하고 기본적인 것들임을 알았습니다.
거기에 또 더한 것은, 이번 달에 재독할 책 1권을 선정하는 것.
스스로 선정하는 이 달의 책인 것이죠.
생각해 보면 베스트셀러 작가나, 서점 대표들만이 아니라 일개의 저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었어요.
기쁘게 책장을 훑다가 한 권을 선정했습니다.
(혼자 결정한 것이기에, 이번 달의 책은 언제든 변경이 가능하다는 것이 장점이에요.)
냉장고에 붙여둔 11월 습관 달력의 동그라미는 채워지고 있습니다.
변명의 여지가 없을만한 쉬운 것들이지만 눈에 보이는 확실함이 역시 톡톡한 효과를 주고 있습니다.
실은 제가 타이탄의 도구들을 읽게 될 줄은 몰랐어요.
커다랗고 요란한, 하지만 다 알 것만 같은 이야기가 담긴 책은 손이 잘 가지 않았는데 제가 스스로 이 책을 찾아 읽게 된 것은, 역시나 모두 나와 똑같은 사람들, 결점투성이인 사람들이 이뤄낸 땀과 노력의 이야기에 이제 더 이상은 모른 체하지 않고, 눈 흘기지 않고, 저 또한 앞으로 무수한 작은 목표들을 이루고 좋은 영향을 받으며 잘 살아보고 싶어서입니다.
오늘 저는 두 개의 동그라미를 채웠고, 새벽 1시 전에 자기만 하면, 오늘 하루도 작게나마 성공인 것입니다.
이렇게나마 저는, 덜 실패하며 정말 정말 하루하루 잘 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