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어렸을 때, TV 화면에 새해로 바뀌는 1월 1일의 바닷가에 사람들은 모래알처럼 모여 있고, 수평선 너머 빨갛게 떠오르는 해에 대고 소원을 비는 진심 어린 모습을 바라보며 해는 저렇게 1월 1일에만 바다 위에서 솟아오르는구나, 그러니 저렇게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간절한 것이로구나 싶었습니다.
1월이 아닌 5월이나 11월, 그렇게 한 해의 중간도 아니고 분기도 아닌 달에 우리 가족은 훌훌 가벼운 마음으로 바닷가에 일출을 보러 떠나본 적이 없기 때문일까요.
해는 산에도 바다에도 우리 집에도, 매일 어김없이 찾아오고 떠올랐지만 해의 위치와 존재에 대해 무심했던, 약간 바보 같고 순수했던 시절입니다.
저는 그 후로도 바닷가에 일출을 보러 간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20대의 한 가운데 우리가 사귀고 있던 어느 봄날, 누군가 해 뜨는 걸 보러 가자고 제안해서 우리는 그날 기차표를 예매하고 늦은 오후 동해바다로 떠났습니다.
계절은 봄이었지만 바닷가에 불어오는 밤바람은 매우 차서 해변가에 돗자리 하나 깔고 우리는 부둥켜 앉은 채 바닷바람을 버티며 그 한 밤을 꼬박 새웠습니다.
해가 떠오르려는 그때, 어스름하게 밝아오려는 때, 그때 우리는 추암 어디에 있었고 촛대바위가 잘 보이는 곳으로 가서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았습니다.
그 기억은 지금도 잊히지 않습니다.
바다에서 해를 맞이한, 새해도 아니고 그냥 어느 날 떠나 맞이한 일출의 아침, 그날 잠을 못 자 얼굴은 약간 부은 채로 덥수룩한 머리로 담요를 두른 채 멋진 해를 배경으로 미소 지으며 남긴 그때의 사진은 소중합니다.
(그날의 사진이 궁금해서, 그때는 얼굴이며 생활이며 기분이며 모든 것을 공유했던 싸이월드에서 그 사진을 찾으려고 보니 복구했었던 아이디와 비번을 홀랑 까먹어버렸고, 아이디 찾기를 누르니 먹통이네요. 괜찮게 지내고 있던 게 갑자기 이렇게 아쉬워지지만 추억은 추억으로, 가슴과 머리에 고스란히 저장되어 있으니 다행입니다.)
해는 또 매일매일 바다 위에서 솟아올랐을 테고, 저도 해처럼 매일매일을 살았습니다.
어느덧 우리는 결혼을 했고 그렇게 십여 년이 지난 며칠 전, 강릉에 일출을 보러 가자는 그의 제안에 저는 선뜻 응했습니다.
남편은 새벽 3시 반에는 출발해야 한다고 들뜬 목소리로 말한 뒤 일찍 잠자리에 들었고, 저는 그 말을 듣고 3시에 알람을 맞춰놓았습니다.
몇 시간 뒤 그런 빡빡한 스케줄이 있음에도 저는 일찍 잠들지 못하고 밤 11시나 돼서야 잠들었습니다.
4시간의 잠을 잔 뒤, 3시 알람 소리에 벌떡 잘도 일어났고 양치질로 잠을 깨운 뒤 따뜻한 차를 텀블러에 담고, 간식들을 챙겼습니다.
얼굴에 로션도 톡톡 바르고 옷도 거의 다 입은 채로 기다렸지만, 남편은 3시 20분이 다 되도록 잠에서 깨지 않고 공주님처럼 곤히 자고 있었습니다.
매일 차고 자는 애플워치도 풀어둔 채로요. 내가 잠든 사이 계획이 바뀐 건가 싶었습니다.
제게는 곤히 자는 사람을 흔들어 깨우는 것이 정말 정말 어려운 일인데, 그래서 이 새벽 곤히 자고 있는 이 사람을 깨워야 하나 말아야 하나, 아직 선크림을 안 발랐으니 나도 잠옷으로 갈아입고 다시 누워 잠을 더 잘까 싶었습니다.
우리가 예매해둔 비행기 표도, 기차표도 없었으니 보챌 것도 없었습니다.
둘이서 한 가벼운 약속을 깨버려도 충분히 괜찮아서 고민을 하다가 남편을 깨웠습니다.
아쉬울 것 같아서요.
이렇게 결심하고 떠날 수 있는 때가 쉬울 것 같아도 잘 없으니까요.
살살살 흔들어 깨우니 남편은 토끼처럼 놀라 일어났습니다.
저보다 더 먼저 깨어, 조금만 더 자자 하고 알람도 시계도 모두 풀고 다시 잠들었었나 봐요.
약속한 출발 시간에서 살짝 늦어졌지만, 일출을 볼 시간은 충분했기에 우리는 새벽 4시에 서울 도심을 가로질러 강릉으로 향했습니다.
가로등이 환한 도심의 도로를 지나 가로등이 없는 깜깜한 새벽의 도로를 달렸습니다.
사람이 없는 새벽 시간에 도로 위를 달리는 것은 조금 이상합니다. 약간 꿈속 같거든요.
일출을 목표로 하는 드라이브에는 신남과 들뜸도 묻어있고요.
안흥을 지날 때는 뿌연 안개가 껴서, 따뜻한 시트에 몸이 노곤해져 졸음이 오려던 것이 달아나 버렸어요.
"신들이 이 시간에 찐빵을 쪄 먹나 봐."
조수석에 앉은 저는 약간의 잠을 품고 있어서 그런 동화같은 말이 튀어나온 듯 해요.
아무튼 그렇게 생각하니 위험하고 무서웠던 그 구간이 귀엽게 느껴졌어요.
커다랗고 둥그런 모양을 한 신들이 사람들 곤히 잠든 새벽 시간에 조용히 내려와 옹기종기 모여 하얀 찐빵을 호호 불어먹는 찐빵 구간.
상상은 이렇게나 큰 힘이 있어서 찐빵 구간은 조금 길었지만, 우리는 그 길을 상상의 힘으로 용감하게 무사히 잘 지나왔어요.
깜깜한 도로를 달리고 달려 강릉에 도착하니, 도시의 불빛이 무척이나 반갑게 느껴졌어요.
곧 있으면 해가 뜨려는지, 어둠이 차차 사라지고 있었어요.
우리는 안목해변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산 같은 구름이 하늘의 절반을 가리고 있어서, 오늘 해는 못 보겠구나 싶었습니다.
해의 선명도를 우리가 조절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와보지 않으면 잘 모르는 것이니까.
아쉬워도 어쩔 수 없고, 여기까지 일출을 보러 왔다는 데에 큰 의미를 두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차차 지나자 노란 해가 구름을 뚫고 나오려고 하는 순간, 저는 갑자기 몹시 흥분되었습니다.
봐야 해, 더 잘 보고 싶어! 욕심이 났습니다.
해가 더더더더 잘 보이는 곳으로, 해가 뜨는 곳으로, 해를 향해 등대와 방파제가 있는 곳으로 마구마구 달렸습니다.
그렇게 달려본 적이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신나게 힘차게 달렸습니다.
공기는 차가웠지만 맑고 상쾌했습니다.
매일매일 이런 시간을 만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11월의 어느 날이 1월 1일이 된 것처럼, 저는 두 손 모아 해를 향해 새해 첫날 제가 보았던 사람들의 표정을 하고 마음 깊이 바라는 것을 빌었습니다.
해는 어디에서나 볼 수 있고, 기도는 어디에서나 빌 수 있지만, 장소와 시간이 달라졌을 때 어느 하루의 아침이 이렇게나 특별해진다는 것을 오랜만에 다시 느꼈습니다.
매일매일 이런 시간을 만나면 어떨까, 상상했습니다.
어느 봄날에 이어 그리고 이렇게 어느 가을 끝에서 바라본 일출도 역시나 훌륭했습니다.
맑은 해는 잠깐 얼굴을 비춰주고는 금세 사라졌고, 언제나 그랬듯 자연은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음을 느끼며 오늘 만난 해와 친구처럼 사진을 남기고, 우리는 입김 나오는 차가운 아침에 따뜻하고 든든한 순두부를 먹으러 느린 발걸음을 옮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