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달력을 잘 사지 않습니다.
난 달력을 보지 않을 거야 하는 단호한 다짐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그렇게 되었어요.
간혹 마음에 드는 그림 달력을 샀을 때는 뭔가 아까워서 달력 종이에 제가 연필 선 하나도 잘 못 긋더라고요.
그림 달력은 대부분 글씨도 작기 때문에 일정을 적는 데 무리가 있기도 하고요.
달력이라고 샀지만 그것은 제게 매월 그림이 바뀌는 전시 작품이 되는 것이죠.
그렇게 깨끗한 1년이 지나면 작품은 고스란히 소품이 되어버리고, 달력을 보던 제 시선과 마음은 시들해집니다.
그러기를 몇 번 반복하다가 이제는 그런 달력조차 잘 사지 않고 있습니다.
12월이 되기 훨씬 전부터 여기저기서 달력 구매글이 보였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뭐든 빨리하는 것을 좋아해서, 그렇게 앞서서 달력을 준비하고 구매하는 걸까요.
그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달력을 구매했던 저의 마음을 떠올려보자면 마음에 들었던 이유도 있었지만, 이번 해의 3/4지점에서, 올해는 약간 아쉽다, 약간 망했나 하는 느낌을 뻥 차버리게 되는, 새 옷을 사는 것과는 다른 기분으로 새해를 미리 기다리는 데 있지 않을까요.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이 아닌 것.
지금의 무용함이 유용함으로 바뀌는 그때를 기다리는 것.
구매한 달력을 잘 품고 있다가 새해가 오면 깨끗한 기분으로 내 시선이 머무는 곳에 잘 걸어둬야지~~ 하는 물결. 콧노래. 흥얼거림.
시작하는 월요일에 주말을, 까만 평일에 빨간 휴일을, 몇 주 뒤에 있을 소풍을 기다리는 마음과 비슷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달력을 사는 것이겠죠.
더 잘 살아내고 싶은 마음을 달력에 품으며.
새 마음 새 기분으로, 기대하는 마음으로요.
하지만 저는 그런 기분을 다 느껴보았고, 그러고 난 1년 뒤의 제가 어떠한지를 몇 번 경험해 봤기에 이제 저는 달력을 잘 사지 않는 사람이 되었고.
끝이 어떻게 될지 뻔히 보이는 그 약간의 씁쓸함을 없애줄 만큼 맘에 드는 달력을 아직 만나지 못했고.
사실 그에 앞서 마음에 쏙 드는 달력을 만날 것이라며 눈에 불을 켜고 달력을 찾아보려는 열정도 없긴 합니다만.
저는 이렇게 기대와 설렘도 없는 사람이 된 것은 아닐까... 하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듭니다.
새해의 준비물은 다른 것으로 준비하면 되겠죠.
내가 만든 결심이라던가, 열정이라던가, 뭐 그런 걸로요.
12월이 왔습니다.
연말이 다가오니 각양각색의 모임이 많이 보입니다.
함께 모여 차를 마시거나, 영화를 보거나, 리스를 만들거나.
한곳에 옹기종기 모여 무언가를 함께 하는 것이 촛불만큼이나 따뜻해 보여요.
그리고 12월에는, 크리스마스가 있지요.
저는 겨울이 오면 트리를 설치하는 집에서 자란 것도 아니었고, 산타가 없다는 것도 진작에 알아버린 채 컸지만, 저는 여전히 이 겨울의 분위기가 좋습니다.
캐럴을 틀어 미리 앞서 기분을 내는 것.
썰매와 루돌프, 지붕과 산타, 눈 내리는 마을, 그런 동화적이고 귀여운 가사가 반복적으로 나오는 캐럴에 외국 가수들의 소울풀한 바이브레이션을 듣고 있으면 피식 웃음이 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 그대로 흉내 내며 저 또한 즐겨봅니다.
1년을 지내는 달력보다 짧은 유통기한(!)이라는 게 있지만, 이맘때 듣는 캐럴에는 분명한 신남이 있지요.
그러고 보니 저는 달력을 찾기보다 12월이 오기 전부터 캐럴을 찾아듣고 있었네요.
이것은 새해를 기다리며 달력을 준비하는 것과 비슷한 결의 마음이에요.
그러고 보면 사람들은 참 귀엽습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재미있게, 잘 살고 싶어 하니까요.
봄이라서, 여름이라서, 가을이라서, 겨울이라서.
평일이라서, 주말이라서, 휴일이라서.
시작이라서, 중간이라서, 끝이라서.
자주 만나서, 오랜만이라서.
기분이 좋아서, 혹은 별로여서.
계절과 요일과 상황과 기분에 따라 여러 이유와 핑계를 만듭니다.
매달 14일에 이벤트가 있는 것도 어떤 상술로 보면 또 그러하겠지만 재미로 보면 귀엽습니다.
이제 우리 앞으로 좋은 이유가 되어주는 것들이 다가오고 있어요.
크리스마스에는 뭐 할까, 연말에는 뭐 할까, 하는 기대와 설렘은 지금 이맘때 품을 수 있는 기분이겠지요.
미리 그려보며 준비하는 마음에 미소가 묻어있다니, 고맙고 다행인 일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