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닦고 슬픔이 조금 옅어진 뒤 편지를 써야, 이걸 읽으시는 분들이 덜 힘드실 텐데
정리되지 않고 잘 추스르지 않은 상태에서 이런 무거운 편지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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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금요일, 외할머니가 위독하시다는 전화를 받고 그때부터 저는 숨이 조금 답답해졌고, 최악의 경우를 생각했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어요.
몇 번이나 이런 위기가 있었지만 그때마다 잘 견뎌내주셨기에 이번에도, 이번에도, 이번에도 잘 견뎌주실 거라 믿었습니다.
토요일 아침, 엄마의 무거운 목소리로 할머니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외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몇 초간은 믿기지 않다가 울음이 터졌습니다.
십여 년 전 친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그때 태어나 처음으로 목도한 내 가족의 영정사진을 보고 저는 참을 수 없는 눈물을 쏟아냈고, 그때의 슬픔이 너무 커서 저는 아직까지도 드라마든 어디서든 장례식 장면을 잘 보지 못합니다.
눈 내리던 12월, 우리 외가의 가장 큰 어른이셨던 외할머니도 이제 사진으로만 남으셨습니다.
장례식장에 도착했을 때, 엄마는 힘없이 의자에 앉아 엄마를 부르며 아이처럼 울고 있었습니다.
보잘것없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드리고 작아진 우리 엄마를 안아드리는 것 밖에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내겐 할머니이지만 우리 엄마에겐 엄마.
엄마는 엄마를 잃었습니다.
며칠 전 통화가 마지막일 줄은, 더 길게 통화를 할걸, 보고 싶은 사람들 여기 다 모였는데.
그런 말을 하며 엄마는 하얀 국화꽃이 만개한 사진 속 할머니를 보며 얼굴이 붓도록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울었습니다.
코로나 여파로 몸이 약해진 엄마는 회복이 덜 된 채로 엄마 잃은 슬픔으로 며칠 사이 더 야위었고 힘들어 보였습니다.
저는 그런 나의 엄마가 걱정이 되어 엄마가 눈앞에 보이지 않으면 마음을 졸이며 찾았고, 엄마 옆에서 엄마를 지켰습니다.
저는 할머니에게는 첫날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영정사진도 제대로 보지 못했어요.
인사를 하면 할머니와 진짜 헤어져야 할 것 같아서요.
쭈글쭈글 마른 손으로 내 손을 잡아주던 감촉, 하나밖에 없는 우리 혜련이라고 말해주는 할머니의 목소리를 이제 다시는 느낄 수 없고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 날, 집안 어른들과 가족들 모두 모여 제사를 지낼 때 이제는 저도 할머니에게 인사를 해야 했습니다.
할머니께 이것밖에 못해서 자주 찾아뵙지 못해 죄송하다고 하늘에 계신 할아버지 만나서 허리 꼿꼿하게 건강하게 행복하게 사시라고,
남은 우리 가족 잘 지켜달라고 그렇게 빌며 인사했습니다.
할머니 안녕, 안녕, 안녕.
슬픈 와중에 위안이 되었던 것은 할머니 마지막 가는 길 평온한 얼굴로 가셨다는 아빠의 말.
우리 외가 식구들이 할머니 외롭지 않게 여럿이 함께 곁을 지켰다는 것.
로비에 풍기던 국화꽃 향기. 자손들이 보내온 넉넉한 물품.
가족들과 친척들과 할머니 곁에 한데 모여 잠들어보는 밤.
나를 외손녀라는 이유로 친손자 손녀들과 차이를 두던 어린 시절의 기억.
그런 서운함은 어린 시절의 것이고, 내게 주신 사랑을 떠올려보면 그것이 더 큽니다.
누가 누군가에게 품는 서운함은 기대 때문이 아니었을까.
저는 사랑받고 싶은 손녀였고, 분명 사랑받은 손녀였습니다.
저는 확실히 사랑받았습니다.
며칠 사이 너무 큰 슬픔과 많은 감정들이 저를 휩쓸고 지나갔습니다.
외면하고 싶지 않은 슬픔이기에, 이렇게 편지에 쓰게 되었습니다.
저는 한편으로 죽음 곁에서 열심히 살자는 마음을 먹었습니다.
저는 이 시간을 잘 보낼 거예요.
몇 번이고 울며 쓴 글이지만 글을 쓰며 할머니를 한 번 더 떠올리고, 추억합니다.
이곳엔 좋고 행복한 이야기만 쓰고 싶었지만 이렇게 잘되지 않는 날도 있네요.
괜찮다가도 웃다가도 할 일을 하다가도, 불쑥불쑥 눈물이 흐르고 슬픔이 찾아옵니다.
고민 끝에 몇 주 간만 휴재를 하려고 해요.
단정 지을 수 없고 확정할 수 있는 것이 지금은 없어서
언제 돌아오겠다 말씀드릴 수가 없지만 천천히 잘 회복하고 돌아오겠습니다.
소중한 여러분,
건강하세요.
따뜻하게 지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