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인사를 드립니다.
잘 지내고 계시나요.
기약 없는 휴재를 했다가 이렇게 불쑥 찾아왔습니다.
오늘은 언제나 단 하루뿐인 소중한 날이지만, 그래도 날짜엔 나름의 힘이 있어서 연말에 하는 인사와
새해에 건네는 인사엔 차이가 있고 단어와 마음가짐이 달라지니까요.
연말 편지는 꼭 보내드리고 싶었어요.
여러분께 반가움의 편지가 되면 좋겠습니다.
뒷모습이 안 보일 때까지 손을 흔들며 배웅을 길게 하는 사람처럼 언제나 제 편지는 길었지요.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스레 긴 편지를 읽어주신 소중한 여러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지난 편지를 받고 위로의 말씀과 선물을 보내주신 분들께 다시 한번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모두 정말 고맙습니다.
저는 요즘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냅니다.
멍하니 스마트폰을 보아도 몇 시간은 훌렁 가고, 책상에 앉아 작업을 해도 시간은 갑니다.
귀한 걸 알면서도 대충 써버리기도 하고, 소중히 아끼며 쓰는 날에도 시간은 똑같이 흐릅니다.
오늘 내게 대체 뭐가 남았나 싶은 한심한 날이 있고, 어느 날은 작업이라도 했네 하며 위안 삼는 날이 있습니다.
힘들 땐 가사 있는 음악은 아예 못 듣겠더니 이제는 여러 장르의 음악을 무리 없이 잘 듣게 됐고, 뾰족한 마음일 땐 남들 좋은 모습에도 시큰둥하더니 응원하는 계정에는 하트를 누르기도 합니다.
이렇게 나는 괜찮아졌나 싶다가도 어느 날은 툭 터져서 어깨가 흔들리도록 코가 따갑도록 흐느껴 울기도 하고요.
슬픈 와중에도 배고플 땐 여전히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고 웃긴 일이 있으면 웃음이 납니다.
잘 지내는 게 어떤 건지, 그런 생각을 못 하다가 이 추운 겨울에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다 문득 깨달았어요.
함박눈이 꽃잎처럼 내리는 날 소파에 누워 하염없이 창문을 바라보다 저는 알았어요.
엉망인 날도 그저 그런 날도 조금 괜찮은 날도 있다가, 이상하게 힘이 나는 날도 있다는걸요.
이랬다가 저랬다가 유난히 변덕스러운 저이지만, 그것이 요즘의 저입니다.
짜증과 화와 슬픔이 마구 엉킨 감정의 덩어리로 무기력하게 지내다가도 아주 반짝 찾아오는 기쁨을 찌르르 느낍니다.
뭐라도 하겠다며 힘을 내는 저를 기특해하기로 했습니다.
2022년 한 해를 돌아봅니다.
끝이 조금 힘들다고 올 한 해 모두를 뭉뚱그려 별로였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며칠 남은 올해의 달력 옆에서,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며 매달 하나씩 인상 깊었던 일을 기록해 보기로 했습니다.
▪️1월 - 국립수목원에서 '겨울 철새 탐조 프로그램'을 참여한 것
▪️2월 - CR 콜렉티브에서 열렸던 고사리 작가님의 '드는 봄' 전시를 본 일
▪️3월 - 몸도 마음도 힘들었던 달 (아빠 무릎 수술 + 나 그리고 남편 모두 코로나)
▪️4월 - 솜씨 좋은 친구가 만든 수제 쿠키의 고소하고 달콤한 맛
▪️5월 - 하동 숙소에서 봤던 파노라마 풍경
▪️6월 - 에무시네마에서 봤던 중경삼림
▪️7월 - 삼세영 갤러리 전시를 보며 꿈을 다짐해 본 일
▪️8월 - 무더위에 떠났던 1박 2일 여정의 정동진독립영화제
▪️9월 - 2022 프리즈에서 에곤쉴레의 압도적인 원화를 본 것
▪️10월 - 제주에서 느끼고 보았던 울창한 숲의 기운
▪️11월 - 어느 날에 본 안목해변에서의 해돋이
▪️12월 - 빛이 쏟아지던 거실에서 우리 가족
어느 달엔 인상 깊었던 일이 여럿이라 하나를 꼽기 어려운 달도 있었네요.
힘든 한 해였어도 좋았던 기억을 떠올려보면 아주 촘촘합니다.
2022년은 여러분에게 어떤 한 해였는지요.
올 한 해 수고한 나에게 뜨거운 박수와 따뜻한 포옹을 해주어요 우리.
아무쪼록 여러분, 즐겁고 뜻깊은 연말 보내시길 바라며, 우리는 새해에 반갑게 만나요!
다가올 새해에는 품고 싶은 소중한 기억들이 가득하기를, 보석처럼 빛나기를, 둥근 달처럼 환하기를.
그리고 자주 많이 웃는 한 해가 되리라 믿어요.
저는 또르르르 다시 돌아올게요.
고마운 마음 담아,
혜련 드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