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요즘 이불 밖으로 나오는 것, 그리고 책상 앞에 앉는 것이 어렵습니다.
이불 밖만 나와도 하루의 기분을 다르게 바꿔볼 수 있고, 책상 앞에만 앉아도 글 한 줄, 선 하나라도 만들어낼 수는 있을 텐데요.
이 두 가지가 참으로 잘되지 않더군요.
느지막하게 시작하는 하루의 표정은 무겁고 거기에 찾아오는 것은 게으름과 무기력, 걱정과 불안이었습니다.
며칠 내내 제게 붙어있는 반갑지 않은 그런 감정을 데리고서는 어떤 활동도 산뜻하고 매끄럽게 잘되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망친 하루 제대로 망쳐보자,는 마음은 오래가지 않고요.
간단한 산책과 외출도 어쩌다 한 번이고, 저의 활동 반경은 집 안으로 한정됩니다.
그나마 이루어지는 저의 생산적인 활동이란 식물에 물을 주며 식물이 흡수하는 작은 물소리를 듣는 것, 성실하게 쌓이는 얄미운 먼지를 버리는 것, 화장실 바닥의 머리카락과 수전의 물때를 제거하는 것, 잠깐 힘이 나면 거기에 기대 빨래를 개고 너는 것, 하루에 한 끼라도 새 밥과 새 국을 지어 따뜻하게 먹는 것, 씻어야 할 그릇과 내 몸을 거품 내어 닦는 것.
매일 혹은 며칠간의 주기로 이루어지는 잠잠한 일들, 귀찮고 피곤한 일들을 해치우거나 해내거나.
거기서 오는 잠깐의 뿌듯함은 반짝 왔다가 금세 사라집니다.
거의 대부분의 저는 소파에 착 붙어 종이 인형처럼 있다가 무언가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는 자책에 결국은 씁쓸해집니다.
그러다가 손을 뻗게 되는 것은 남이 만들어놓은 창작물.
내 안에서 뭔가를 끄집어낼 수 없다면 내 안에 뭐라도 집어넣자.
나오지 않는 아웃풋 대신에 양질의 인풋을.
아까운 시간을 죽이지 않는 것으로.
내가 쓰는 시간이 죽지 않고 살아나는 것으로.
먼저 자연스레 결심이 되는 것은 지금 내가 하지 말아야 할 것.
그것은 대단한 것이 아니라 한 번 빠져버리면 헤어 나올 수 없는 릴스, 숏츠, 유튜브 영상에 혹하지 않으며 그것을 클릭해 도미노처럼 이어지는 알고리즘을 끊어내는 것입니다.
불쾌한 피로감만 남는 그 보람 없는 시간과 이별한다면 그 시간에 나는 얼마나 많은 일을 할 수 있을까.
소파를 벗어나 창밖의 하늘을 바라볼 수도 있을 것이며, 시 하나를 낭독할 수도 있고, 스트레칭도 할 수 있을 것이며, 적은 공간을 청소할 수도 있고, 따뜻한 물을 끓여 차 한 잔의 여유도 부릴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저리 보내고 후자의 일을 하는 것이 지금 제게는 이로울 것입니다.
헤맬 것이라면 도서관과 서점을 찾을 것, 미술관과 갤러리를 찾을 것, 영화관과 공연장을 찾을 것, 음악을 들을 것, 식당을 가볼 것, 이유 없이도 바깥에 나가볼 것.
그리고 제가 붙잡을 것이라면 이런 것.
가슴과 머리에 어떤 감정과 생각을 하게 하는 것, 운이 좋으면 용기와 힘까지 얻을 수 있고, 감동이나 만족, 관심과 설렘, 생기와 활력이 되어주는 고마운 것들입니다.
그렇게 찾고 헤매고 느끼고 발견하는 나날을 보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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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지난해 가을부터 김연수 작가의 글을 틈틈이 찾아 읽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다 읽은 책은, '우리가 보낸 순간:시' 편인데요.
거기에 이런 문장이 있더라고요.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건, 왜 한 해의 시작이 겨울의 한복판에 있느냐는 점이죠. 전날까지 불던 바람과 오늘 부는 바람이 전혀 다를 바 없이 추운 그런 나날의 하나가 도대체 왜 새해의 첫날이 되어야만 할까요? 개나리와 진달래와 목련 꽃이 만개하는 날을 새해의 첫날로 삼으면 좋을 텐데요.
(…) 푹 자고 일어나면 온 동네에 봄꽃이 활짝 피어 있는 거죠. 그날부터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는 겁니다. (…)
희망에 가득 차서. 마치 새로운 세상의 시작을 알리는 것처럼. 멋지잖아요.
-김연수, <우리가 보낸 순간: 시>, 문학동네, 214p
새해가 왔대도 저는 여전합니다.
이부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부지런한 사람도 되지 못했고, 어떤 목표를 향해 힘찬 발걸음을 내딛지도 못했습니다.
여전히 고여있고 머물러만 있는 것 같을 때,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무언가 달라져야 할 것 같고 무언가를 시작해야 할 것만 같습니다.
조급함과 답답함을 외로이 느낍니다.
사실 요즘 제가 가장 바라는 것은 몸과 마음의 평화입니다.
작년 1월 1일에 써놓은 목표를 우연히 들춰보게 되었는데, 하지 못한 것이 대부분이더군요.
허무맹랑한 목표들도 아니었던 것 같은데 이루지 못한 것이 많았습니다.
보지 않았으면 좋았을까 싶다가도 뭐든 해내고 싶어 했던 작년 1월 1일의 제가 생각나 기특함과 더불어 그때의 제가 그립기도 했어요.
위 글을 읽으며 생각했어요.
한 해의 시작은 겨울의 한복판이어서, 이 춥고 메마른 계절에 무언갈 다짐하는 것은 쉽지 않은 것일 수도 있겠다 하고요.
한 해의 시작이 꽃 피는 봄에 있었다면 내 마음은, 나는 조금 달라졌을까 싶어 이런 글에 기대어 한참을 한참을 들여다보게 되었어요.
나를 위해 써준 글 같아서요.
하지만, 이 책에는 이런 시도 실려 있습니다.
이근화 시인의 '나는 내 인생이 마음에 들어'라는 시.
그 한 부분을 여기에 실어봅니다.
가방아 내 가방아 낡은 침대 옆에 책상 밑에
쭈글쭈글한 신생아처럼 다시 태어날 가방들
어깨가 기울어지도록 나는 내 인생이 마음에 들어
아직 건너보지 못한 교각들 아직 던져보지 못한 돌멩이들
아직도 취해보지 못한 무수히 많은 자세로 새롭게 웃고 싶어
*
그러나 내 인생의 1부는 끝났다 나는 2부의 시작이 마음에 들어
많은 가게들을 드나들어야지 새로 태어난 손금들을 따라가야지
좀 더 근엄하게 내 인생의 2부를 알리고 싶어
내가 마음에 들고 나를 마음에 들어 하는 인생!
계절은 겨울부터 시작되고 내 마음에 드는 인생을
일월부터 다시 계획해야지 바구니와 빵은 아직 많이 남아 있고
-위의 책, 116-117p
이 시는 위의 글과는 다르게 일월부터 뭔가가 꿈틀거리기 시작합니다.
이 시를 읽고 있으면 마음이 또 달라져요.
그래, 내게는 아직 건너보지 못한 교각들이 있지, 던져보지 못한 돌멩이들이 너무나 많지.
그렇게 나도 많은 가게를 드나들고 새로 태어난 손금들을 따라가며 많은 경험들을 하고 싶어집니다.
무수히 많은 자세로 새롭게 웃고 싶어집니다.
요즘 제 마음이란, 이렇게나 쉽고 가볍습니다.
하루 안에서도 집 안에서도 제 마음은 수시로 바뀝니다.
어떤 글을 읽느냐에 따라 제 마음은 이랬다가 저랬다가 이 문장에 기댔다가 저 문장에 기댔다가, 변덕을 부립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공감과 위로를 받았다가 조금은 깡충거릴 수 있는 용기와 의욕을 얻기도 합니다.
저는 이렇게 가벼운 마음을 데리고, 쉽게도 흔들리는 저를 붙들고 하루하루 지내고 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나의 선택. 그렇게 태어나는 나의 생각과 나의 마음과 나의 언어들.
혼자 서기 힘들 때, 저는 이렇게 누군가 만들어놓은 창작물에 자주 기댈 것입니다.
나를 살리는 시간에 기댈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오늘 어디에 기댈 것인지, 그래서 나는 어떤 마음으로 살고 싶은지.
올 한 해를 어떻게 보낼 것인지는 여전히도 제 하기 나름일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