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잘 지내고 계신가요. 이번 편지에도 제 이야기가 길게 담겼습니다. 넉넉한 마음으로 읽어주세요. ☺️ 😷 아팠어요 지난 토요일 새벽, 심한 구토 증세와 복통이 찾아와 얼른 화장실로 달려갔고 홀로 괴로운 시간을 보내고 나와 화장실 문 앞에 잠깐 쓰러져 누웠습니다. 창백해지고 저릿한 몸을 혼자 주물러보다가 응급실에 전화를 해야 하나 살짝 고민했습니다. 하지만 몇 번의 응급실 경험으로 그러면 정말 더 큰일이 난 상황에 들어가는 것만 같아 무서웠고, 이런 별일 아닌 일로 위급한 상황이 많은 현 상황의 응급실에 가는 것도 좀 아니라는 생각도 들어 생각을 고쳐먹었습니다. 조금 힘을 내어 다시 침대로 돌아와 괜찮다 괜찮다 혼자 다독이며 잠을 청했습니다. 정말 괜찮을 줄 알았지만, 아침이 되자 저는 온몸에 힘이 빠져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평소 잘 먹었던 과자봉지만 봐도 속이 울렁거리고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고작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누워서 몸을 뒤척이는 것 밖에 없었고,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어 물과 이온음료로만 목을 축이며 하루를 지냈고, 침대 위에서 22시간 정도를 누워만 있었던 것 같아요. 너무 누워만 있어 허리가 아팠지만 그렇게 아파 일어서면 어지러워서 5분도 채 일어나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그나마 유일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손가락을 까딱하여 어딘가에 답장을 보내거나 멍하니 책이나 영상들을 보거나 잔잔한 방송을 듣는 것이 전부였어요. 무언가를 해도 책을, 핸드폰을 손에서 픽 픽 매번 놓치고 스르르 기절한 듯 잠에 빠졌습니다. 그 와중에도 끝까지 보게 된 것은 내셔널지오그래픽이 제작한 '웰컴 투 어스' 중 다섯 번째 시리즈, <생명의 속도>였습니다. '지구의 가장 오래된 사막에서 빠르거나 느려서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발견한다'라는 문장을 보고 클릭했어요. 거기서 말미잘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사막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폭포 속 확대한 물방울을 보고 범고래와 카멜레온이 사냥하는 것을 보고 우유니 사막에 비치는 은하수 등을 보았습니다. 자연의 거대함과 경이로움이 핸드폰 화면 속을 뚫고 나오더군요. 이런 무해한 자극은 아플 때에도 약간의 도움이 된다는 것이, 침대에 누워 있으면서도 살아 있는 생생한 자연의 영상에 기대고 있는 제가 조금 신기했습니다. 아픈 원인을 찾자면 잘 모르겠어요. 토요일 낮에 다녀온 살바도르 달리 전시장에서는 달리의 작품이 내뿜어내는 에너지와 수많은 인파가 힘들어 제가 감히 함부로 덤빈 느낌이었고, 떨쳐내려 해도 큰 기운과 자극이 자꾸만 저를 찌르는 것 같았습니다. (전시장에서 준 티켓의 그림도 못 보겠기에 뒤집어 놓았습니다.) 뛰쳐나오듯이 헐레벌떡 전시장을 나와 허기를 채우고 집에 돌아와 영화 한 편을 보고, 저녁엔 군만두 세 개와 오이지를 먹고 현미칩을 먹고 천혜향을 먹었는데 그게 탈이 난 걸까요. 정확하고 명확한 이유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매우 복합적일 것 같기도 하고, 정말 그냥 우연히 생겨버린 고통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어느 날 갑자기 아무 상처도 없는 오른쪽 새끼발가락이 스치기만 해도 극심하게 따갑다던가, 입안에 난 동그란 사마귀 같은 것처럼요. 어떤 고통과 상처들은 나도 모르는 어느 하루아침에 생겨 버려 곤란해지거나 당황스럽기도 하니까요. 월요일 아침까지도 힘이 없고 어지러워 잠시도 가만히 서 있기 힘든 상태가 되었습니다. 남편이 만들어준 미음을 몇 숟가락 떠먹고 그것도 더 먹기가 힘들어 관두었습니다. 병원을 가보자는 말에 힘들어 못 가겠다고 짜증을 부리고 침대에 누워있다가 후회했습니다. 하루 종일 저를 돌보며 걱정해 준 사람에게 짜증이라니. 기운과 기분이 모두 가라앉은 상태에서는, 어떤 말을 어떻게 가려서 해야 하는지 제 언어와 어조의 판단력까지 흐려져 버립니다. 다시 침대로 찾아온 남편에게 사과를 하고 기운을 내어 병원을 가보겠다고 했어요. 간신히 잠옷을 벗고 아무 옷이나 걸칩니다. 양말을 신습니다. 양치질을 간신히 해냅니다. 건네주는 패딩을 걸치고, (이럴 때엔 패딩 같은 것도 왜 이리 무겁게 느껴지는지요.), 신발장에서 운동화를 신으려고 하는데, 허리를 구부려 운동화 뒤축을 발에 맞춰 신는 그 간단한 행위도 힘이 들어 슬리퍼를 신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세상 힘없는 발걸음으로, 눌린 머리로, 풀린 눈으로, 그렇게 터덜터덜 남편의 부축을 받으며 병원에 도착했습니다. 의사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여기는 두 번째 방문인데 이렇게 좋았나 싶게 모든 것을 기대고 싶을 만큼 위안이 되는 의사 선생님이었습니다. 제 복부 여기저기를 눌러 진단을 해주시고, 혈압을 잰 제 혈압이 꽤 낮게 나왔는지 정말 기운이 없는 것 같다고 사실만을 짚어 말하는 의사 선생님이, 엄마도 아닌데 엄마가 떠올라 왈칵 눈물이 쏟아질 뻔했습니다. 몸이 약해지니 눈물샘까지 더 헐거워지는 것 같고.. 하지만 그런 걸 들키기는 싫어서 눈물샘을 꽉 잠그고 있는 힘을 꽉 쫘서 씩씩하게 대답하고 그랬습니다. 약 처방을 내리고 그래도 정 기운이 없다면 다음에 수액을 맞으러 오라고 하기에 오늘 맞고 싶다고 했습니다. 아무도 없는 수액실에 들어가 침대에 누웠습니다. 간호사 선생님이 주삿바늘을 왼쪽 팔에 찌르는데 몸 안에 수분이 모두 빠져나갔는지 혈관을 찾을 수가 없어 두 번이나 실패했습니다. 실패한 구멍은 더 아픈 것 같고 피가 나서 지압을 했습니다. 거꾸로 누워 또 다른 선생님에게 오른팔을 맡겼는데 이번에도 실패할까 봐 손톱자국이 손바닥에 깊게 패일 듯이 오른쪽 주먹을 꽉 쥐었습니다. 다행히도 이번에는 한 번에 성공해 전해질 수액제와 아미노산 영양제가 제 몸속으로 잘 흘러 들어왔습니다. 수액을 맞는 시간 동안 푹 잠에 빠질 줄 알았지만 일요일 하루 종일 잠에 빠져 기진맥진한 채 누워 지내서인지, 수액 맞는 시간 내내 정신이 또렷해 잠이 한숨도 오지 않아 조금 지루하기도 했습니다. 움직임은 제한된 채로 꼼짝 않고 누워 수액을 맞는 것은 영 유쾌한 기분은 아니지만 다행히 나아지고 있다는 사실에 기운이 차려집니다. 뭔가 뜨끈하고 좋은 것이 몸에 돌긴 돌아 생기가 돌아오고 있는 것인지. 그러면서 하루 새 아무것도 아닌 일들이 새삼스레 소중해지고 그리워지는 것입니다. 하도 많이 걸어서 다리가 좀 아프다고 말하는 내가, 맛있는 걸 맛있다고 하며 눈 동그랗게 뜨며 먹는 내가, 뽀득뽀득 기운차게 씻을 수 있는 내가, 좋은 걸 보며 호들갑 떠는 내가, 웃기고 신나는 일에 깔깔깔 웃으며 ㅋㅋㅋ을 미친 듯이 쓰고 있는 내가요. 3시간 정도 수액을 맞고 주삿바늘을 뽑았습니다. 잠깐의 피가 나왔지만 그런 건 이제 아무 상관이 없고, 아주아주 작은 구멍에서 나오는 피는 잠시 후면 멎습니다. 고생한 작은 구멍에 살색 반창고를 붙입니다. 깔끔하게 반창고를 붙이자 잘 마무리된 것 같고 저는 다 나은 것만 같습니다. 빨대로 쪼르륵 다 마셔버린 비닐팩의 음료처럼 수액의 비닐도 쪼그라들었고, 그 모든 수액은 나에게로 들어와 쪼그라든 나를 조금 부풀려 놓았습니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는 비가 살짝 내렸습니다. 우산 없이도 잘만 걸었고 확실히 조금 힘이 났습니다. 그날은 밸런타인데이라서, 병원에 누워 있으면서 먹고 싶다 생각한 초콜릿을 사러 편의점에 갔습니다. 없던 식욕이 찾아온 것은 이제 정말 기운이 돌아왔다는 것이겠죠. 집에 와 따뜻한 물에 천천히 씻었습니다. 작은 초콜릿을 입에 넣었습니다. 그것은 정말 아주아주아주 소중한, 달콤함이었습니다. 누구나 사는 동안 목격자를 필요로 한다고 느낄 때가 많아요. 사람에게는 오로지 나 자신만이 알고 느낀 것만으로는 결코 충분하지 않은, 타인에게 보여주거나 말해주어야 비로소 그 일이 있었다고 소화해낼 수 있는 이상한 마음이 있는 것 같거든요. -정세랑, 김인영, 손수현, 이랑, 이소영, 이반지하, 하미나, 김소영, 니키 리, 김정연, 문보영, 김겨울, 임지은, 이연, 유진목, 오지은, 정희진, 김일란, 김효은, 김혼비, <언니에게 보내는 행운의 편지>, 창비, 120p 수액을 맞고 온 그날 밤 저는 통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잠들어야 한다는 의무감을 내려놓기로 했어요. 일요일에 잠의 적정량을 지나쳐 그런 것이라고, 하루 온종일 자버렸으니 다음 날은 조금 덜 자도 되지 않나 생각하며 책 한 권을 들어 읽기 시작했습니다. 책 한 권을 앉은 자리에서 다 읽어버렸어요. 대부분의 글이 좋았지만 위 글에 많이 공감이 갔어요. 저 아팠어요, 수액을 맞았어요, 하지만 지금은 많이 좋아졌어요. 아픈 일은 부끄러운 것도 아니고 해서는 안 될 말도 아니라고 생각해요. 저는 제게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적고 싶었습니다. 작은 아픔이나마 글로 쓸 곳이 있고 이구 이런, 딱하지, 같은 눈빛으로 보다가 지금은 괜찮아 다행이다,라고 말해줄 것 같은 여러분들이 저 너머에 계실 거라고 믿으며 이 글을 적었습니다. 저는 몸에게 따끔한 경고를 받았습니다. 노란 딱지를 받은 저는 살살살 약해진 몸을 잘 보살필 것입니다. 소중하고 소중한 여러분, 많이 자주 행복하세요. 아픔, 고통, 불행들은 아주 잠깐씩만 이렇게 스치고 지나갔으면 좋겠습니다. 🎼 은근한 위로가 되었던 곡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유튜브로 이동해 음악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라포엠(LA POEM) - 사랑의 노래 홀로 캄캄한 수액실에 누워 있으면서 다행히도 잘 챙겨간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던 노래는 라포엠의 '사랑의 노래'였습니다. 라포엠. 팬텀싱어를 열렬히 챙겨 보며 응원했던 팀이었는데, 잠시 잊고 지냈습니다. 이렇게나 매력적이고 조화로운 팀이었지, 다시 한번 느꼈어요. 아픔과 어울리는 노랫말은 아니지만 이 곡을 듣고 있으니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지고 덜 외로워졌어요. 앨범의 이미지도 희망 쪽으로 나아가고 있는 듯해요. 🙂 *라포엠은 트릴로지(Trilogy)라는 프로젝트를 시작했고,Ⅰ은 Dolore(고통), Ⅱ는 Speranza(희망), Ⅲ는 Vincere(극복)이라는 3부작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소개해드린 곡은 두 번째 Speranza(희망)의 앨범에 수록되어 있는 곡입니다. (완성된 EP형태의 스페셜 앨범 이미지는 연결된 듯 이어져요.) P.S. 제 이야기로 가득 찬 편지를 드렸네요. 다음에는 밝은 기운을 머금은 편지를 드릴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 NOTE 꾸준한 뉴스레터를 잘 만들기 위해 후원을 받고 있습니다. 보내주시는 후원금은 감사히 소중히 잘 받아 더 나은 양질의 컨텐츠로 보답하겠습니다. 🚀 뉴스레터 후원 🚀 3333-04-0148917 (카카오뱅크, 정혜련) (후원이라는 이야기에 부담 갖지 마세요, 떠나가지 마세요. 후원은 자유입니다.) 꾸준히 읽어주신 것만도 제겐 더없는 후원이고 크나큰 힘입니다. 완두콩 구독자분들 건강하세요, 늘 감사합니다 💚 mind_ryeon@naver.com 수신거부 Unsubscribe |
✦ (정)혜련이가 보내는 편지, HYEPEA LETTE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