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요일은 정월대보름이었죠.
아예 모르고 있다가 남편이 엄마와 스피커폰으로 통화하는 걸 듣다가 알았어요.
찰밥이라도 해먹으라는 이야기가 건강 잘 챙기라는 말처럼 들렸지만 흘려듣게 되었죠.
외식과 외출이 잦았던 지난주에는 집에서 제대로 된 밥을 차려먹지 않았어요.
관성이란 참 희한한 것이 안 하다 보면 계속 안 하는 방향으로 가고 싶어집니다.
식사를 차리는 것도 그중 하나라 될 수 있으면 안 하는 쪽으로 마음이 가게 되고, 시간을 내서 요리를 하는 것이 점점 더 귀찮아집니다.
그러다 보면 냉장고에 신경을 잘 안 쓰게 되고, 점점 더 먹을 것이 없어지고.
먹어야 한다면 최대한 간단하게 손이 덜 가는 면, 빵, 떡으로.
그것들이 부대끼고 지겨워 무엇이라도 하게 된다면 설렁설렁 만든 원푸드로 허기를 때웁니다.
정월대보름도 그런가 보다 하고 얼렁뚱땅 지나가려고 했는데, 그랬는데.
갑자기 나물 반찬이 너무 먹고 싶어졌습니다.
집에 나물이 없는데, 나물을 어디서 구해야 할지는 모르겠고, 각종 나물 맛을 맛보며 자란 어른으로서 그 건강한 맛이 갑자기 몹시 고팠습니다.
나물을 어디서 사야 하나, 어디 잘 하는데 없나 하고 포털사이트 검색창에 '서울 나물', '서울 곤드레밥' 등을 입력했어요.
빈약하고 어설픈 검색어에 마음에 드는 식당은 당연히도 잘 없었고 그나마 궁금했던 식당은 휴무였습니다.
접시 가득 담긴 여러 종의 나물들과 따끈한 된장국, 거기에 지글지글 솥밥으로 한 끼를 차려주는 곳 어디 있는지.
분명 어딘가에는 있을 텐데, 왜 나는 그런 식당 하나 뚫어놓지 못하고, 지도 안에 표시된 수많은 별들은 어느 것 하나도 오늘의 쓸모를 발휘하지 못하는지.
나는 어쩌다 이렇게 정월 대보름날 입맛 다시며 어설프게 나물 검색이나 하고 있는 건지, 참.
먹지 못하니 더 먹고 싶어지는 간절한 마음.
그렇게 나물을 바라며 바깥에 나와 있는 제게 엄마에게 온 문자.
공주, 오곡밥 먹어야 하는데
시래기 삶아서 먹어
시래기 미지근한 물에 오래 담가서 푹 불려서 오래 삶아야 하는데
그렇게 엄마는 제게 '하는데, 하는데'로 끝나는 문자를 보내왔어요.
그 뒤에 어떤 문장이 더 붙어야 할 것 같은데 말이죠.
엄마의 문장 뒤에는 어떤 마음이 있었을까요.
아니 나는 나름 검색으로 노력(!)을 해봤지만 오늘 나물 먹는 것은 글렀다고 결론지었고, 가뜩이나 먹고 싶은 거 못 먹는 내 속도 몰라주는 엄마 문자에 약간 심통이 나려고 했어요.
그나저나 호칭에 놀라셨다면 죄송합니다. 굳이 알고 싶지 않으셨겠지만.. 쑥스러우나 아직도 저는 집에서 공주로 불리고 있습니다.
소중한 마음으로 불리는 호칭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제가 공주는 무슨. 저는 그저 엄마 속도 모르는 자식일 뿐이고 아 그만 그만. 알아서 먹겠지 참... 이런 못난 마음이나 들었지요.
하지만 엄마가 왜 이 시래기 얘기를 하시냐면, 사실 저희 집 베란다에 지난가을 엄마가 걸어두고 간 시래기가 있거든요.
4개월 가까이 바깥에 있던 시래기는 아주 바짝 잘 말라 있었어요.
집에 있는 나물이라고는 그거 하나.
나물을 못 사 오거든, 나물이 정 먹고 싶거든 이 녀석을 해 먹어야 합니다.
하지만 저는 시래기가 손이 얼마나 많이 가는 녀석인지 언젠가 마트에서 뭣도 모르고 샀다가 된통 당한(!) 경험이 있어 만만하지 않은 재료임을 알기에 손이 쉽게 가지 않습니다.
이것을 요리하려거든 대단한 결심과 인내의 시간이 필요하거든요.
하지만 자꾸 나를 흔드는 엄마, 아니 흔들리는 나.
결국 저는 뭔가 꼭 챙겨 먹어야 할 것 같은 마음에 요리 안 하려는 관성을 깨고 엄마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엄마, 시래기 어떻게 삶는 거야?"
엄마의, 엄마만의 깊은 노하우가 있을 줄 알았지만, 엄마의 결론은 "인터넷에 찾아봐~" 였고.
저는 살짝 웃기고 당황스러웠지만, 전화를 끊고는 이 역시 포털사이트의 도움을 받기로 했습니다.
제가 찾은 푸드전문블로거의 글에는 하룻밤 동안 물에 담가두었다가 다음날 아침에 삶았다고 하더라고요.
불리는 시간을 길게 가져야 시래기 삶는 시간을 줄일 수 있다고.
그러니까 저는.. 정월 대보름날엔 시래기나물 못 챙겨 먹는 것이었습니다.
하아, 아쉽지만 어쩌겠어요.
오늘부터 준비하는 내일의 한 끼를 위해 저는 보름 다음날에야 바지런을 떨어야 했지요.
하룻밤 동안 물에 푹 재워둔 시래기는 아침에 보니 아주 말랑해져 있었고, 흙이나 모래가 나오지 않을 때까지 여러 차례 찬물에 바락바락 씻었습니다.
깨끗해진 시래기를 넉넉한 곰솥에 옮겨 담아 1시간 정도 삶았습니다.
골고루 삶아지도록 위아래를 뒤집어가며 삶아야 하니 불 곁을 떠나지 않고 잘 살펴줘야 합니다.
집안은 시래기 냄새로 쿰쿰해지지만, 그 냄새는 아주 구수하고 또 이 공기는 뭔가를 만들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니 흐뭇하기도 하지요.
그렇게 다 삶은 뒤에는 40분쯤 뜸을 들였습니다.
그러고는 보들보들한 식감을 위해, 대망의 겉껍질 벗겨내기를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이 귀한 시래기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재료입니다.
1단계 불리기에서 이미 하룻밤을 썼고, 이제야 마지막 단계에 온 것입니다.
가만히 식탁에 앉아 부들부들해진 시래기를 하나씩 잡고 겉껍질을 벗겨내고 있으려니, 그 시간은 아주 잠잠하고 또 심심하기도 해서 친구들과의 수다가 그리워집니다.
그래도 목욕한 듯 말끔해진 시래기의 자태를 보니 뿌듯함이 밀려옵니다.
이렇게 하여 시래기 삶는 법의 모든 과정이 끝났습니다.
오늘 먹을 만큼의 양을 빼놓고, 남은 것은 소분한 뒤 지퍼백에 시래기와 시래기 삶은 물을 함께 부어 냉동실에 넣어두었습니다.
꼼꼼한 살림꾼이 된 기분.
베란다에 널려 있던, 손으로 꽉 쥐어 만지면 부스러질 것 같던 시래기는 물속에서 찰랑찰랑 춤을 출 듯 부드러운 나물이 되었습니다.
시간이 정성이라는 그 뻔한 말이 새삼스레 몸으로 느껴졌습니다.
대보름 다음날 해 먹은 정성스러운 시래기밥과 시래기청국장.
나물 못 먹어 심통 났던 저는 사라지고, 하룻밤 새 생글한 얼굴을 하고 이렇게 공들여 잘 차려먹었으니 올해 나는 건강할 것이라고 풍요로울 것이라고 그렇게 내 맘대로 믿기로 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