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중에 찾아오는 요의는 반갑지 않습니다.
정말 정말 귀찮습니다.
모르는 채 더 자고 싶어 잠시 참아 봤다가도 어쩔 수 없이 무거운 몸을 일으켜 화장실로 갑니다.
화장실에서 나오며 구겨진 얼굴로 시계를 보니 분침과 시침이 아침 6시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완전한 새벽인 3시나 4시쯤이었으면 약간 깬 정신에도 다시 침대에 누웠을 텐데, 오늘 6시는 이야기가 달랐어요.
기운이 달라진 것인지, 오늘은 이상하게 몸이 많이 무겁지도 않고.
아침 6시에 어디 갈 데도 없는데, 하루를 일찍 시작하는 부지런한 사람처럼 방을 나와 봅니다.
거실과 주방은 커튼 사이로 비치는 아파트 조명으로 하얗게 어스름하고 익숙한 우리 집이라 모든 것이 눈에 훤하지만 이 시간에 잠을 깬 나는 낯섭니다.
아마 이 색은 밤 시간과 비슷한 조도로 크게 다르지 않을 텐데, 저무는 밤 혼자 있는 시간과 시작하는 아침에 깨어 있는 나의 기분은 이렇게나 다르군요.
티 나지 않게 조용히 남몰래 성공한 느낌입니다.
주방에 가서 미지근한 물을 챙겨 먹고, 쌀을 씻었습니다.
요 며칠 내내 집밥을 제대로 안 해먹고 냉동밥을 데워먹거나 밥 없이 대충 때우거나 바깥 밥을 먹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반짝반짝 윤기나는 밥이 먹고 싶었습니다.
저는 언젠가부터 밥맛이 뭔지 아는 사람이 됐거든요.
집에 있는 쌀은 '22년 햅쌀 보약 같은 경기 여주 쌀'이며, 갓 지은 밥이 얼마나 맛있는지 아니까, 다른 건 하나도 생각이 안 나는데 밥, 밥, 그 윤기나는 밥이 먹고 싶어 이른 아침부터 쌀을 바락바락 씻는 제 모습에 약간 코웃음이 났습니다.
기운인지 알았는데 사실 허기 때문에 강제 기상을 한 것 같아요.
국은 뭘 끓일까 하다가 배추 된장국을 끓이기로 하고 두세 번째 쌀뜨물을 냄비에 담아두었습니다.
쌀뜨물을 개수대에 흘려 버리지 않고, 조금 나중에 끓일 국을 생각해 미리 준비해두는 것이죠.
이것 참 별것 아니지만 이럴 때 스스로 조금 으쓱하게 되는데, 제가 요리에 아주 숙련된 사람처럼 보이거든요.
그런 기분이 들 때가 또 있는데, 그것은 냄비나 웍 같은 곳에 반찬을 만든 뒤 눈대중으로 반찬통을 찾아 덜었는데, 그것이 딱, 양이 적지도 넘치지도 않고 아주 깔끔하고 적당하게 새 반찬이 반찬통에 스르륵 들어갈 때의 쾌감 또한 여기에 포함됩니다.
사부작사부작 주방 일을 하고는 거실로 돌아와 소파 양쪽에 있는 스탠드를 켭니다.
노란 불을 탁, 하고 켜니 해는 아직 자고 있지만 나는 오늘의 해보다 먼저 하루를 시작하는 듯 산뜻한 기분이 몰려듭니다.
그래 해야 너는 조금 더 자렴.
책을 보려고 합니다.
아아, 일찍 일어났는데 이렇게 아침부터 책까지 읽다니.
성공한 교양인이 된 것 같습니다.
책 욕심은 있는 대로 부리며 읽고 싶은 책 네 권을 골라 옆에 두고는 무슨 책을 읽을까 하다, 중간까지 읽다 만 요조 님의 '만지고 싶은 기분'을 이어 읽기로 했습니다.
저는 책도 약간 TV처럼 봅니다.
내 취향이 아니거나 재미없는 채널이 나오면 다른 채널로 바꾸듯, 저는 그때그때 기분과 상황에 따라 여러 권의 책을 옮겨 가며 읽습니다.
책상에도, 거실 스탠드 옆에도, 침대 협탁 위에도 책이 있습니다.
책의 제자리란 책장이겠지만, 사실 책의 정확한 제자리란 없는 것 같고 내 집에서 내 책들을 두고 싶은 곳에 두는 것이 뭐 그리 못난 짓일까 싶고요.
책을 읽는 습관과 버릇은 각각 저마다 다를 거라고 생각하는데, 이것이 지금 제게 정착된 독서습관입니다.
당길 때, 즐겁게, 읽고 싶은 책을 읽자.
조금 엇나간 이야기이긴 하지만, 예전에 좋아하는 출판사의 책을 무료로 받을 수 있다는 장점에 혹하여 서평단을 한 적이 있어요.
당연하게도 그냥 주어지는 공짜는 없는 법.
책을 받았으면 읽어야 하고, 읽었으면 여러 곳에 감상평을 써서 남겨야 하는 서평단의 수순이 있습니다.
아무리 좋아하는 출판사여도 정기적으로 나오는 책 모두가 내 취향과 관심사가 아닐 수 있으며 의무로 읽는 책은 숙제하는 기분이 들어 영 즐겁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그때쯤에, 책은 좋아하는 마음으로 내가 선택해서 읽자는 마음이 생겼던 것 같아요.
아무튼요, 그렇게 오늘 아침에 선택한 '만지고 싶은 기분'의 책을 보는데 어찌나 좋던지요.
고요한 아침에 읽는 책이 얼마 만인지 모르겠습니다.
책을 보다 고개를 들어 바깥을 보니 까맣던 하늘이 회색과 연한 파랑이 섞인 옅은 하늘색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서서히 날이 밝아오는 것을 색으로 느낍니다.
꾸벅꾸벅할 줄 알았는데 말똥말똥한 눈으로 책을 읽었습니다.
'자연스러운 한국말'을 지나며 뭉클했다가 제목이기도 한 '만지고 싶은 기분' 챕터에서는 약간 눈물이 나기도 했습니다.
책 한 권을 다 읽어야지,라는 결심도 없었는데 어쩌다 보니 책 한 권을 끝까지 다 읽었어요.
드디어라는 마음보다 아니 벌써의 마음이 크게 들 만큼 오늘의 책이 제 아침 무드와 참 잘 맞아서 좋았어요.
책의 여운이 남아서 연필을 쥐고는 책을 후루룩 다시 보며 밑줄을 긋습니다.
이제 이 책은 완전한 내 책입니다.
그러다가 다시 주방으로.
밥을 짓고, 국을 끓이고, 따뜻한 반찬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구수한 밥 냄새와 보글보글 끓고 있는 된장국, 포도씨유에 달궈지는 달큰한 마늘로 주방의 냄새는 풍요롭습니다.
계란의 알끈이 끈질겨도, 실수로 계란 프라이에 소금이 확 부어져도 짜증 나지 않습니다.
평소의 저 답지 않은 정말 이상한 아침입니다.
저는 오늘 아침 6시부터 8시까지 2시간 동안 우쭐함과 산뜻함, 보람과 재미와 뭉클을 넘나들었습니다.
거기에다 갓 지은 윤기나는 밥으로 아침 식사를 했고, 하늘색의 변화로 깜깜한 밤같던 아침과 동이 트려는 새벽의 아침, 그리고 환하게 바뀐 완전한 아침의 3단계를 보았어요.
아침은 이렇게 다양한 것들을 느낄 수가 있는 것이었지요.
아주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지냈습니다.
결심과 의무로 만나게 되는 아침 말고요, 3단계의 아침에서 느지막하고 찌뿌둥하게 맞이하는 아침 말고요, 이렇게 우연히 만나는 평온한 아침을 또 만날 수 있으면 좋을 텐데요.
설거지를 하다가 오늘의 아침을 사진으로 남겨둘 걸 하는 약간의 아쉬움이 들었지만 스마트폰을 집어 드는 순간 저는 엉뚱한 데 홀려, 오늘 보낸 많은 것들을 만나지 못했을 거예요.
오늘 만난 이 이상하고 아름다운 아침은 쉽게 오지 않을 것을 알기에 오늘을 크게 부풀려 약간 특별하게 만들고,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사진 대신 글자로, 이렇게 편지로 남겨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