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났던 여행지를 손에 꼽자면 강릉이 일 순위일 것 같아요.
이상하게 그곳엔 자석 같은 장소가 여럿 있어서 나를 이끌고, 우리를 이끌고.
이번 여행은 한 장소를 그리며 세 시간 가까이 차를 타고 그리던 장소에 갔습니다.
그곳은 '보헤미안'이라는 카페.
그나저나 강릉은 순두부가 유명하잖아요, 아침으로 그만한 메뉴는 잘 없지요.
순하고 부드럽고 든든하고.
그렇게 속 편한 순두부를 저는 참 좋아합니다.
(그리고 저는 이 식당의 청국장을 좋아해요.)
아침을 먹으러 매번 가게 되는 곳은 동화가든인데, 여긴 워낙 유명해서 아침 8시 반에만 가도 주차장이 만차고, 갈 때마다 대기를 합니다.
그래도 생각나는 곳은 여기뿐이라 지난 여행에서도 자연스럽게 아침식사를 이곳에서 해결하려고 했지만 먼발치에서도 느껴지는 대기의 기운...
여행자에게 아침은 중요하잖아요. 그런데 그날은 아니다 싶었어요.
이렇게까지 긴 시간 대기를 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크게 들어 여느 식당이 아닌 보헤미안 카페를 가기로 했습니다.
저는 카페인에 취약해 커피를 잘 마시지 못하고, 카페에 가면 열에 아홉은 차 종류를 시키거나 아주 가끔은 디카페인 커피를 마시기도 하지만, 어쨌든 순전히 커피 맛을 느끼기 위해 카페에 가는 일은 제겐 잘 없는 일입니다.
그러니 아침에 카페를 가는 건 제겐 조금 낯설고 새로운 일.
그러나 이곳엔 반갑게도 보헤미안 세트, 커피 한 잔과 토스트, 고로케와 계란이 제공되는 간단한 아침을 해결할 수 있는 메뉴가 있었습니다.
고로케라니! 내가 좋아하는 고로케라니!?
커피로 유명한 이곳에 저는 잡지 부록 때문에 잡지를 사는 듯한 기분으로, 카페에 커피를 맛보러 가는 게 아닌 오로지 아침식사 해결을 위해 보헤미안에 갔습니다.
이렇게 세련되지 못하지만 이게 저인 걸요.
낮 시간에 와본 적은 있지만 이렇게 여유로운 아침 시간에 온 적은 처음이었어요.
이곳엔 디카페인 메뉴가 없어 저는 자몽차 하나를 시키고, 커피를 즐기는 남편은 보헤미안 세트를 시켰습니다.
잠시 뒤 각기 다른 꽃무늬가 그려진 고운 찻잔에 우리가 시킨 자몽차와 커피가 담겨 나왔고, 그러고는 하얀 접시에 동그랗고 통통한 고로케와 버터가 올라간 두툼한 토스트에 딸기잼, 그리고 삶은 계란과 작고 귀여운 소금통이 함께 나왔습니다.
저는 커피를 잘 즐기지 못해도, 맛있다 하며 커피를 즐기는 사람이 앞에 있고, 좋아하는 고로케가 따뜻하고 바삭해서 기분이 좋았습니다.
보헤미안 세트는 1인분의 양이 넉넉한 편이어서 하나를 같이 나눠 먹었는데 충분히 든든했어요.
실내의 분위기도 천천히 눈에 들어옵니다.
붉은 벽돌과 옅은 무늬의 타일, 진한 나무색 테이블과 의자, 천장에서 내려오는 노란빛의 펜던트 조명, 작고 앙증맞은 식기들, 곳곳에 놓인 초록의 화분들, 그리고 소란스럽지 않은 실내.
이 시간의 손님들은 대부분 단골인 듯했고, 몇몇은 우리처럼 여행 온 사람들.
가볍게 아침을 먹으며 잠을 깨우는 듯한 분위기, 그래서 이곳은 마치 힘주어 멋부리지 않은 조용하고 아늑한 어느 호텔의 1층 식당 같습니다.
모든 풍경과 소리가 너무도 편안하고 자연스러워서 몇 번 와보지 않은 저 같은 여행자도 이곳의 한 부분이 된 듯했습니다.
이제 강릉에서의 아침은 여기에서 해결하면 되겠다는 결심이 섰습니다.
강릉, 아침은, 여기, 보헤미안!
첫 만남에 의도치 않게 마음에 쏙 드는 시간을 보내고 반해버리는 경험.
우리가 직접 느끼고 발견한 우리만의 장소는 더 소중해집니다.
그렇게 제게 자석 하나가 또 생겼고, 서울에 오니 아 보헤미안 가고 싶네... 이런 사치스러운 기분이 들고요.
강릉은 서울에서 조금 머니까 가벼운 마음으로 훌쩍 갈 수도 없고요.
그러니 괜히 더 생각나고 그리워집니다.
어느 날은 일기를 세 시간을 썼습니다.
밀린 일기를 쓰다 보니 할 말도 많아지고 생각도 많아졌습니다.
그렇게 쓰다 쓰다가, 살이 쏙 빠지고, 요즘 제게 인생이 재미없다던 우리 오빠가 생각나 복잡한 마음에 눈물바람을 하기도 하고.
그러다 생각난 건 여행.
오빠와 여행을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날 저녁 오빠에게 문득 전화를 걸었습니다.
이번 주말에 뭐 하냐고 물었더니 집에서 쉴 거래요.
여행을 가자고 했더니 싫은 내색이 없길래 강릉에 가자고 했습니다.
이왕 가는 거 1박도 하기로 했습니다.
약속시간과 장소는 토요일 오전 9시 30분, 강릉시 수리골길 121-4 보헤미안.
그렇게 우리는 토요일 아침에, 이른 출발로 약간은 부운 얼굴과 은근한 설렘을 묻힌 채 보헤미안에서 만났습니다.
오빠와 나 단둘은 아니었고, 우리 부부와 오빠, 이렇게 셋이었지만 그건 그것대로 괜찮았어요.
우리가 좋아했던 시간과 맛을 오빠에게 소개해 주고 싶었습니다.
여기 커피가 얼마나 유명하고 맛있는지, 여기에서 아침을 먹자고, 여기에서 여행을 시작하자고.
따뜻하고 맛있는 시간을 보내고 난 뒤 우리가 와 본 강릉의 코스를 오빠와 함께 했습니다.
이날의 날씨는 운 좋게도 너무나도 좋아서 해변에 돗자리를 깔고 앉았습니다.
맛있는 푸딩도 먹고요.
해변에 놀러 온 사람들도 구경했습니다.
영차영차 거리며 타이머를 맞추고 우리의 뒷모습도 담아보았습니다.
앞의 봄 햇살은 약간 눈이 부셨고, 바람은 선선했고, 등은 기분 좋게 따뜻했습니다.
이런 날씨와 시간을 지나고 있구나 생각했습니다.
모래가 옷에 묻어도 괜찮은 날.
신발을 벗고, 조금 모자란 돗자리에 벌러덩 누워 하늘을 보았습니다.
정말 파란 하늘이었습니다.
기분 내려고 신은 오늘의 초록색 양말.
두 발도 하늘로 쭉 뻗어보기도 합니다.
땅의 시야에서, 나는 땅이 되고.
하늘과 내가 수평이 되어 바라보는 하늘은 참으로 넓고 파랗고 예뻐서 쉽게 행복해졌습니다.
이렇게 종종 번개 여행을 하자고 했어요.
모임 이름은 뭐로 할까 하다가, 보헤미안이라고 하기로 했습니다.
우리는 생각도 차림도 전혀 보헤미안스럽지 않아서 이 단어를 카페 이름이 아니라 우리에게 갖다 쓰는 것에 약간 쑥스러운 웃음이 흘러나왔지만, 거기엔 살짝 즐거움도 있었어요.
마음 모아 가는 반짝 여행, 카페에서 먹는 흐뭇한 아침, 해변에 펼치는 돗자리, 등 뒤로 쏟아지는 따스한 햇살, 모래사장에 누워 바라보는 하늘.
우리가 누린 수식어만 보면 이건 분명 보헤미안적 여행이 아닐까 생각해요.
일 년에 몇 번 보헤미안.
가는 것, 돼보는 것.
이것 참, 썩 괜찮은 일상의 들뜸이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