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요즘 동시 수업을 들어요.
시를 배워보고 싶어 시 창작 수업을 들어볼까 하다가도 시 앞에서는 왜 이리 작아지고 머뭇거리게 되는지. 그렇게 주저하고 망설이다 대부분의 시 수업을 놓쳤습니다.
그런데 그 즈음, 친구가 동시 수업을 신청했다기에 저도 쫑쫑 따라가 보기로 했습니다.
동시는 쉽지 않을까, 가볍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요.
하지만 동시 수업 첫 시간부터 슬렁거리며 동시 세계에 들어온 저는 그 마음과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 동시 수업의 목표는 끝내, 하면 할수록 "더 모르겠다."라는 것.
힘 빼고 소파에 앉아 편히 들어야 하는 수업이 아닌 허리와 엉덩이를 의자에 바짝 붙이고 앉아 바른 자세를 하게 되는 수업이었습니다.
헐렁한 교양 수업인 줄 알고 들어왔다가 진지한 전공 수업 교실에 잘못 찾아온 기분이 들었지만 정신이 번쩍, 이미 저는 어어어, 하며 이 수업에 점점 빨려 들어갔습니다.
2시간으로 예정되어 있던 수업 시간은 1시간을 훌쩍 넘겨 3시간 이상이 되고, 듣고 나면 기운이 쫙 빠질 정도입니다.
가만히 앉아 듣는 사람도 이 정도이니, 가르쳐 주는 선생님은 더더욱 힘이 들 것입니다.
좋은 말 귀담아듣고 졸려도 참게 되는, 정말 순수한 열정의 수업입니다.
그렇게 수업을 다 듣고 나면 내 안에 뭔가, 뭔가가 차오르는 기분입니다. 이 기분은 무엇일까요? 새로운 세계가 열린 것 같고 이 세계를 만나게 돼서 반갑고 설레고 벅차고 뿌듯하고.
수업을 듣고 나면 무척 지치는데 엄청난 것을 해낸 것 같은 보람도 함께 들어요.
매주 동시집을 읽고 리뷰도 써야 합니다. 과제는 대충 내면 안 되고, 폰트 서체와 크기, 줄 간격을 맞추어 한글 파일로 제출하고, 동시를 필사할 때는 띄어쓰기, 점 하나에도 신경 써야 합니다.
정해진 틀에 맞춰야 하는 것에, 있지도 않은 한글 파일을 설치해야 해서 가까운 사람들에게 툴툴거리기도 했습니다.
너무 빡빡하고, 번거롭다고. 하지만 이런 것이 아주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단체로 수업을 들을 때는 함께 맞춰가야 하는 규칙이라는 것이 존재해야 함을 느낍니다. 성실한 학생의 태도로 잘 맞춰가는 게 맞는 것이라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어렵고 힘들어요. 그러나 이 힘든 것이 마냥 힘들기만 한 것은 아니에요. 다행스럽게도 힘듦 뒤에 찾아오는 기쁨과 즐거움이 있어 이렇게 앞으로는 투덜거리면서도 뒤에서는 은근한 싱글벙글을 숨기고 있습니다.
동시집을 구하러 오랜만에 헌 책방을 가기도 했습니다.
선생님이 알려주신 동시집 공부 목록을 프린트해서 책방 사장님에게 이 책 있나요? 이 책은요? 물을 때는, 이런 보물 있나요? 그렇담 이 보물은요? 하고 묻는 것 같습니다.
헌 책방은 보물이 너무 많아서 캐야 하는 곳이니까요.
제가 찾는 책은 없어 아쉬웠지만 이렇게 빈손으로 돌아가기엔 헌 책방은 너무나 아쉬운 공간입니다. 좋아하는 분야의 코너를 슥 훑기도 하고, 본격적으로 동시 코너를 가보니 수업에서 처음 들어 알게 된 시인의 이름과 시집의 제목을 반갑게 발견하기도 했습니다.
광고 천재 이제석의 카피가 떠오르기도 해요. 고물상의 고물도 어떤 이에게는 보물이 될 수 있다는.
눈 반짝이며 발견한 보물들. 헌책방에서 캐내온 동시집들은 이제 우리 집에서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두둑하고 든든해요.
책들은 알콜스왑으로 살살 잘 닦아주고, 뜨거운 드라이 바람으로 책장을 휘휘 날리며 제 방식대로 소독해 줍니다.
요즘은 거의 매일 동시를 읽어요.
동시는 마냥 귀여운 것만도 아니고, 쉬운 것도 가벼운 것도 아니란 걸 새삼 느껴요.
어느 날은 수업 내용을 필기하다, 노트 한 켠에 '정혜련 동시집'이라는 여섯 글자를 아무도 모르게 적어보았습니다.
저만 아는 간지러운 기분에 살짝 웃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새로운 동시 세계에 자연스레 스며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