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문구가 진행하는 아임디깅(I'm Digging) 전시에 다녀왔습니다.
사전 예매에 관람료가 있는 전시였고, 저는 당일 오후 1시로 예약을 한 뒤 시간이 거의 다 되어 라운지에서 예매한 표를 보여주는데... 아... 제가 보고 제가 놀랐어요.
오후 12시로 예매를 한 거 있죠.
제 실수가 어이없고 당황스러웠지만 변경은 되지 않는다고 해서 다시 표를 끊고 입장을 했습니다.(또르르...)
시간제한이 없던 아임디깅 2020 전시 때의 불공평한 대기 시간을 개선하기 위해 올해는 60분의 시간제한을 두었다고 해요.
두 배의 입장료를 내고 들어왔으니 더 꼼꼼히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쓰는 사람 23명이 참여한 41권의 노트를 1시간 만에 보는 것은 제게 너무나 부족한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연장하여 보고 싶으면 다시 또 표를 예매하면 되지만, 푯값 앞에서 대인배의 마음이 동하지 않아 1시간쯤 구경하고 아쉬운 마음 뒤로한 채 문구 숍에서 소소한 쇼핑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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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임디깅 전시가 열리는 곳은 서교동 스탠다드에이 쇼룸입니다. 스탠다드에이는 가구를 만드는 곳으로 쇼룸에서 멋스러운 가구들과 함께 편안하고 근사한 공간을 누릴 수 있습니다. 원목 책상 곳곳에, 쓰는 사람들의 노트가 놓여 있어 의자에 앉아 노트를 보면 됩니다.
나누어준 디깅카드에 나만의 문장을 심어보기도 하고, 문장 스탬프를 찍기도 하고, 생각을 싹 틔우는 질문에 답을 해보기도 하며, 쓰고 싶다는 감각이 들썩였습니다.
아임디깅의 전시 문구는 이러합니다.
"나름의 성실로 열매 맺는 쓰는 생활"
가만히 들여다보면 성실 앞에 '나름'이라는 말이 붙어 좋습니다.
나름은 각자가 만들어 가는 고유의 방식.
기록은 남기고 쓰는 자의 몫. 하고 싶은 기록에는 정답이 없고 그저 쓰면 되는 것이지요.
노트는 감사, 취향, 육아, 여행 등으로 각자의 쓰임대로 주제가 다양했습니다.
힘 뺀 글자에 앞부분만 채워진 느슨한 노트도 있었고, 처음부터 끝까지 성실하게 매듭지어진 꽉 찬 노트도 있었습니다.
같은 노트를 두고 사람마다 이렇게 다른 쓰임을 하고, 각자 나름대로 완성한 노트를 보는 것이 흥미로웠습니다.
남의 노트를 이렇게 공개적으로 볼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으니까요.
여러 권의 노트를 보며 각기 다른 글씨체를 보는 것도 즐거웠습니다. 손글씨의 매력은 누군가와 같지 않다는 데 있는 것 같습니다. 다르게 쓰인 글씨를 보며 그 사람의 얼굴이나 성격, 분위기를 가늠해 보기도 하고요. 마음잡는 문장들도 구경합니다.
전시를 보며 따라 해보고 싶은 것이 있어 전시를 다 보고 나온 뒤, 숍에서 플래그를 찾았습니다.
플래그는 가볍고, 언제든 떼어낼 수 있고, 자국이 남지 않는다는 것이 큰 장점이지요.
저도 제 한 줄 한 줄의 문장에 붙이고 싶어 140mm의 플래그를 구매했습니다.
어느 공간을 다녀오면, 어떤 생각과 마음이 훅 바람을 일으켜 어떤 행동을 하게 되잖아요.
저는 그 밤, 조용히 홀로 책상에 앉아 제 일기장을 펼쳤습니다.
거름망 없이 쏟아낸 저의 문장들에 아주 가끔 건져올리고 싶은 문장들, 마음에 드는 문장들이 보여 그곳에 플래그를 스윽 붙였습니다.
플래그는 가볍지만 묵직한 힘을 가졌습니다.
자꾸자꾸 뭔가를 붙이고 싶어 더 더 파고드는 시간. 쉽게 끝내고 쉽지 않은 시간.
재미와 흥미와 발견, 아임디깅 전시를 다녀와 저는 제 일기장을 디깅하게 되었고, 시간이 흐르자 제 일기장 옆면에 작은 깃발들이 생겨 그럴싸하게 보였습니다.
새벽이 다 되어가도록 저는 나만의 문장에 플래그를 붙이고 나만의 문장을 만드는 일에 푹 빠졌습니다.
종이에 뭔가를 쓰는 것은 면과 선이 만나는 일.
누워 있던 것이 일어나는 일.
납작한 것이 부푸는 일.
평면이 입체가 되는 일.
한 장이 모여,
나름의 모양이 되는 일.
그 밤. 플래그는 말 그대로 나의 깃발이 되어 저를 다른 곳으로 새로운 곳으로, 몰입의 시간으로 끌고 가 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