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는 쉼 주간으로 정했습니다.
열도 나는 것 같고, 목은 건조하고, 몸은 무겁고.
어딜 나가고 싶다는 의욕도 들지 않고 집에만 있고 싶었습니다.
(코로나 검사도 해봤지만 음성이었어요.)
일어나 밥을 챙겨 먹고 제일 먼저 찾는 곳이 책상이 아니라 소파라면, 그 한낮 소파에서 책을 펼친다는 건 유익한 시간을 가져보겠다는 의지와는 다르게 저의 경험상 아주 많은 가능성으로 낮잠에게 가는 과정이 되어버립니다.
잘 읽겠다고 연필을 옆에 두고 책을 보는데 스르르 잠이 찾아옵니다. 무거운 몸, 한낮 소파는 잠을 불러옵니다. 30분만 잘까 하고 누우면 세상 나른해집니다. 금세 잠에 들었다가 게슴츠레 뜬 눈으로 소파에 올려둔 패브릭을 더듬더듬 찾아 넓게 펼치고는 에잇 자버리자!라는 기세로 몸을 덮고는 이제는 대놓고 낮잠의 세상으로 가버립니다.
긴 낮잠을 잔 뒤에 찾아오는 기분은 개운함보다는 헛헛함. 뭘 했다고 이러나, 싶은 자책.
그렇게 낮잠을 자버리면 하루의 시간이 다 늦춰집니다. 쉼 주간으로 정했다면서도 낮잠을 자고 나면 멍하게 보낸 것 같은 하루가 아쉽고 밤에는 잠이 잘 안 온다며 자정을 훌쩍 넘겨 버려 새벽에나 잠이 들고, 늦게 일어나 늘어지고... 피곤하고... 다시 소파를 찾고... 그러다 눕고... 그렇게 사흘 내내 낮잠을 잤어요.
낮잠을 자면 욕을 먹을 것 같고 게으르다고 손가락질 받을 것 같습니다.
열심히 살아야지, 낮잠이라니, 누군가는 혀를 끌끌 찰 것 같아요.
낮잠은 자랑이 될 수 없나, 생각했어요.
저는 저의 몸을 민감하게 다루려 해요. 아프다 피곤하다 싶으면 좀 쉬어야겠다 생각해요.
이제 피곤하다 싶으면 몸이 먼저 알아차리고 입술에 포진이 올라와요. 이게 한 번 생기니 피곤할 때마다 계속 생기더라고요. 겉에 생기니 대놓고 표시가 나서 보는 사람들에게 피곤하다고 티 내는 것 같습니다. 이번 주에도 역시 입술 포진과 함께했지요.
그런 것은 드러내고 싶거나 들키고 싶지 않은데, 저를 아껴 주는 사람들은 툭 불어나고 거칠어진 제 입술을 보며 걱정 어린 표정을 지으며 쉬라고 말해줘요.
그런 사람들에게는 낮잠을 잤다고 말해요. 게으름 같아 말하기 부끄럽지만 그렇게 말하면 제게 잘했다고 해줘요.
몸을 챙기는 일은 잘 하는 일이라고, 잘 쉬어줘야 한다고요.
그러면 안도감이 들며 쑥스럽게 기분이 좋아요. 늘어지게 낮잠을 잤는데 잘했다고 해주다니.
저는 아가도 아닌데 말이에요. 멋쩍게도 토닥토닥은 언제나 저를 배시시 웃게 해주는 것 같습니다.
이번 주 낮잠의 결과는 좋았습니다.
낮잠을 자서, 낮잠을 잤으니 뭐라도 해볼까 하는 약간의 에너지가 차올랐아요. 이번 주에 저의 작은 미션은 '집밥 해먹기'인데요. 낮잠을 잔 뒤에는 냉장고를 뒤적거리고 식재료를 꺼내 뚝딱뚝딱 저녁을 차려먹었습니다.
요리를 하는 것도 꽤 에너지가 드는 것인데, 저녁을 만들려고 낮잠으로 에너지를 채웠나 싶을 만큼 이번 주는 기특하게 식탁을 싹싹 닦고 반듯하게 수저를 놓고 반찬을 만들고 금방 만든 따끈따끈한 것으로 속을 채웠습니다. 하루에 한 끼라도 이렇게 차려 먹으면 든든하고 뿌듯합니다.
저전력 모드였던 제가 소파에 길게 누워 쿨쿨 낮잠으로 서서히 충전된 건지도 모르겠어요.
알고 봤더니 저 소파, 내 충전기였나...
아무튼 그렇게 저는 낮잠 뒤에 사리살짝 회복되었고, 입술포진도 거의 다 사라졌습니다.
아주 당연하게도 내 몸은 하나고, 내 에너지도 한정적이지요.
요즘 천천히 읽고 있는 책은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입니다. (지난 76번째 완두콩에도 소개해 드렸던 책입니다.)
거기에 이런 문장이 나오더라고요.
같은 10년이라고 해도, 멍하게 사는 10년보다는 확실한 목적을 지니고 생동감 있게 사는 10년 쪽이, 당연한 일이지만 훨씬 바람직하고, 달리는 것은 확실히 그러한 목적을 도와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주어진 개개인의 한계 속에서 조금이라도 효과적으로 자기를 연소시켜 가는 일, 그것이 달리기의 본질이며, 그것은 또 사는 것의(그리고 나에게 있어서는 글 쓰는 것의) 메타포이기도 한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임홍빈 옮김),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문학사상, 128p.
저는 '주어진 한계 속에서 조금이라도 효과적으로 자기를 연소시켜 가는 일'에 밑줄을 그었습니다.
하루키가 전업 소설가로 살아가자고 결심하며 건강 유지를 위해 달리는 것에, 달리기가 효과적으로 자기를 연소시켜 가는 일이라 말했지만 저는 그 말에 달리기를 하든 하지 않든 결국 우리가 살아가는 일이 연소되어 가는 일이라 느꼈습니다.
저는 그럼 어떻게 내 연료를 효과적으로 쓰며, 어떤 부분에 나를 연소시킬 것인가 생각했어요.
저는 요즘 더더욱 많이 보고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그리는 일에 연소를, 더 깊어지고 넓어지고 그렇게 하여 저만의 것을 찾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낮잠 뒤에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하루키의 달리기 철학 뒤에 제 낮잠을 이야기하는 것이 참으로 우습고 보잘것없지만요.
제 기분이야 어찌 되었든 결국 다행히도 이번 주의 낮잠은 효과적이었다고, 멍함 뒤에 생동감을 찾았다고, 낮잠 뒤에 힘이 나서 또 이렇게 편지를 쓸 수 있었다고, 그런 낮잠을 잤다고 여기에 이렇게 말해요.
헤헤거리는 웃음과 함께 뒷머리를 긁적이며, 사흘 낮잠을 잤다고 말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