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금요일에는 강원도 속초로 향했습니다.
서울과 경기도를 벗어나자 가까이도 멀리도 산-산-산의 연속이었고, 고속도로 지나 국도로 들어서니 우리는 산-나무-나무-산 그 가운데에 있었습니다. 물길을 따라 만든 듯한 도로를 시원하게 달렸고 터널도 여럿 지나쳤어요.
요즘같이 볕 좋은 계절에 차의 속도로 터널을 나올 땐, 불현듯 밝힌 조명을 만난 것처럼 눈이 부십니다. 빛과 어둠의 경계가 확연하고 그 대비가 무척이나 뚜렷합니다.
그렇게 인제를 지나 미시령 터널을 훅 통과했는데, 저만치에 우뚝 솟은 바위가 보였어요.
한눈에 봐도 심상치 않은 위용.
누가 말하지 않아도 저것이 울산바위구나, 짐작이 갔어요.
와, 와, 감탄하며 얼른 핸드폰을 꺼내들어 지나가는 바위를 멍하니 담았습니다.
눈으로 그냥 지나치기엔 너무 아까웠지요.
멋진 건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가만히 있어도 자동적으로 알게 되는 것 같습니다.
티가 난달까요. 아우라가 있달까요.
그러고 보면 여기의 산들은 완만하게 안아준다는 느낌이라기보다 단단히 서서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고, 그걸 계속 보고 있자니 약간 겁도 나고 압도 당하는 게 확실히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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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을 먹고는 속초 시내로 들어와 문우당서림에 갔어요.
문우당 서림에 처음 갔을 때 꽤나 좋은 인상을 받았던 터라 이번에도 기쁜 마음으로 재방문했습니다.
고작 두 번째 방문이지만 가기 전부터 기분이 좋고, 오랜만에 다시 왔어도 여전히 쾌적하고 정성스러운 인테리어와 큐레이션, 여기저기 보이는 다정한 문구들에 눈길이 갔습니다.
곳곳에 보이는 안내사항에는 정중한 부드러움이 보였고, 심지어 화장실 안내사항 문구도 차근차근 읽게 되더라고요.
<화장실 안내사항>
01. 문우당서림은 책과 사람의 공간입니다. 이에 금연을 실천하며 지향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본 건물 내에서는 흡연이 불가한 점 양해와 이행을 부탁드립니다.
02. 매일 직접 화장실을 쓸고 닦습니다.
함께 쓰는 공간을 대하는 당신의 태도에서 배려가 느껴집니다. 깨끗하게 이용해 주세요.
03. 몸이 개운해졌다면, 이제 글의 공간으로 들어갈 순서입니다. 오늘도 잘 부탁드립니다.
<디자인 부스 코너>에는,
매일 컴퓨터에 앉아 고민에 고민을 쌓아 가고 있는 디자이너라면,
이젤 앞의 빈 캔버스가 다소 막막한, 그림과 함께하는 화가라면,
다른 이가 보지 못한 '색'과 '글자체', '선'이 유난히 눈에 들어오는
오늘 나의 인생의 '아티스트'라면, 우리는 모두 '예술인'입니다.
환기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예술인에게 권하는 도서입니다.
-서림인이자 디자이너 이해인의 도서 추천 편지
식물이 있는 곳에는, <서림의 식물 이야기>
문우당서림에는 곳곳에 계절마다 피어나는 식물들이 있습니다.
꽃과 화분을 사랑하는 '이윤희 서림인'이 직접 인근의 화원들에서 데려와 관리하고 있는 식물들입니다. 책과 함께 어우러지는 식물의 향을 느껴보세요.
이 외에도 제가 놓친 문구는 많을 것입니다.
공들여 꾸려놓은 서가에서 눈길과 손길을 주며 저는 한참을 머물다가 나왔습니다.
이날 서점 입구 유리 문에는 휴무 안내가 굵은 글씨로 붙어있었는데요,
6/17
토요일 임시 휴무
서림인 중 한 명의 결혼식을 합니다.
소중한 새 식구 맞이를 위해,
부득이하게 단 하루만 쉬어갑니다.
라고 되어있더라고요.
그 문구를 보는 순간 저는 아주 가까운 이웃이 된 것 같았어요.
서점의 사정으로 쉬어갑니다, 이렇게 쓸 법도 한데요.
서점 2층에서는 사장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내일 아들의 결혼식이 있어 몇 십 년 만에 책방 문을 닫는다고.
아들이 결혼 날짜를 잡을 땐 좋기만 했는데 막상 내일 결혼식을 앞두고선 걱정이 많이 된다고, 어제도 잠을 잘 못 잤다고 하시더라고요. 그 외의 이야기를 술술 해주시는데 그것이 부담스럽다기보다 저희에게 선뜻 마음을 열어주신 것 같아 마음 한편이 푸근했습니다.
책갈피도 챙겨주시고, 샘플 책을 사니 할인도 해주셨지요. 문우당서림에서 책을 구매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받았을 법한 사은품과 할인이었어도 더 특별하고 감사하게 느껴졌습니다.
한 장소는 그 도시의 인상과 이미지를 좌우하기도 하는데, 문우당서림이 있는 도시가 부러울 정도였습니다.
서점을 나오니 깜깜해졌어요. 도심 도로를 달려도 여전히 속초는 늠름한 산에 둘러싸여 있더라고요.
그런 걸 보며 여기는 밤낮으로 산이 지켜주는구나 싶었고, 어두워진 밤 언뜻 본 산의 모습에 콧대 높은 산이 누워 있는 것 같은 얼굴이 보이기도 했어요.
당연하겠지만 속초는 속초만의 매력이 있구나, 그런 심심한 감상을 하며 숙소로 향했습니다.
울산바위도 그렇고, 문우당서림도 그렇고요.
속초에서 좋은 걸 쏙쏙 골라 본 하루였어요.
멋진 것은 말하지 않아도 이렇게 뚝뚝 매력이 흐르고, 다 티가 나요.
조용히 아름답게, 그 자리에서 빛이 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