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지난해 7월 필즈상 수상으로 바쁜 시간을 보낸 뒤 미국으로 돌아가 가장 먼저 연구에 방해되는 일을 모두 중단했고, 수상 전 일상으로 완벽히 돌아갔다고 해요.
이 기사를 읽은 뒤 저는 일기에 이렇게 썼습니다.
이건 허준이 교수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이라면 다 그럴 것이다.
자극적인 것에 모두 약하다.
훌륭한 건 그것을 알고, 내게 무엇을 남겨두었느냐.
내가 집중할 것에 집중하겠다는 강한 의지겠지.
지금 내 주변은, 조금 어수선한 편이다.
여기저기 책이 뒹굴고, 정리를 한다고 하는데도 연필은 여러 곳에 있으며, 작업방은 말할 것도 없다.
이것이 나를 증명해 주는 것이라면 나는 읽는 사람이고 보는 사람이고 뭔가를 만드는 사람이겠지만 그 깊이가 지금은 얕다는 생각이 든다. (…)
오늘도 문장들을 많이 읽고, 뭔가를 만들어보려 했지만 잘되지 않았다.
그 며칠 뒤 컨셉진 100호에서, 저는 이런 글을 보게 됩니다.
인간 행동 전문가인 웬디 우드의 저서 《해빗》에 따르면 의지력, 자제력이 강하다고 불리는 사람은 저항하는 힘이 강한 게 아니라 유혹에 넘어갈 만한 상황 자체를 만들지 않는 사람이라고 한다. (…)
시험공부를 할 때도 '한 시간만 누웠다가 일어나서 해야겠다'하고 누우면 다음 날이 된다는 걸 경험한 사람이라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주식회사 미션캠프 편집부, 컨셉진 CONCEPTZINE 100호 《당신은 무엇을 꾸준히 하고 있나요?》, 185p.
이 문장이 어찌나 반갑던지요, 의지력이나 자제력이 강한 사람은 유혹에 넘어갈 만한 상황 자체를 만들지 않는 것이라는 이 문장.
나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데! 하면서요.
하지만 반갑거나 말거나, 그것을 알아도 실천하는 게 어렵다는 것이 문제이지요.
유혹은 집 안에서도 무수히 도사리고 있어요.
소파와 침대, 광고와 쇼핑, 인스타그램과 유튜브는 얼마나 달콤한지 쉽게 빠져버립니다.
나도 허준이 교수처럼 자극을 없애보겠다며 인스타 안 해, 유튜브 안 봐, 소파에 안 누워 다짐하지만 저스원 텐미닛~같은 그 10분 남짓의 유혹에 혹하는 건 순식간이고, 10분은 1시간이 되고, 2시간이 되고... 으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하며 굼떠진 몸을 후회로 감은 채 일어나게 됩니다.
이렇게 비가 오는 날엔, 온 세상을 적셔주는 이런 날엔, 몸이 무거워져 그 유혹들에 빠지기가 더 쉬운 것 같아요.
아이폰 기능에 '방해금지 모드'라는 게 있다고요.
저는 그걸 오늘에서야 써봤습니다.
오늘은 괜히 글이 안 써진다며 이 작은 네모에 스르르 빠져있다가, 가버린 시간과 아쉬운 나를 탓하기 싫어 유혹을 차단해버렸습니다.
집중이 안 되는 날엔 가끔 저를 타임랩스로 찍기도 해요.
제 물건이면서도 그것이 제3의 눈처럼 느껴지고 관찰카메라처럼 저를 찍고 있는 의식이 강하게 들어, 딴짓으로 새지 않아 저에겐 아주 효과가 좋습니다. 잘 몰랐는데 책을 집중해 읽을 때 미간에 주름이 잡히고, 입술을 오리처럼 내밀고 있더라고요. 밀린 일기를 쓸 땐 종이에 바짝 붙어 기나긴 글을 씁니다. 카메라에 담긴 저의 모습은 후줄근하고 썩 예쁘지는 않지만 그래도 집중하고 있는 모습이 기특하긴 합니다.
어제는 W선생님과 대화하다 '선택'이라는 단어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선택, 선택이라니요.
어찌 보면 너무 쉬운 단어라서 쉽게 잊고 지내는 단어인 것 같습니다.
어른이 돼서 좋은 일은, 선택할 수 있는 일의 폭이 많아졌다는 것일지도요.
무엇을 할지, 어떤 것을 볼지, 누구를 만날 것인지 말입니다.
반대로, 하지 않는 선택도 할 수 있지요.
시간은 너무나 귀해서 점점 더 귀해져서, 그리고 빨라도 너무나 빨라서요.
점점 더 나에게 좋은 쪽, 이로운 쪽의 선택을 하고 싶어집니다.
여전히 어떤 선택 앞에서는 잘 모르겠고 그래서 어느 때엔 조급해지고 절망에 빠지지만, 후회를 덜 하고 싶습니다.
어제는 그림이 안 그려져서 시무룩했고 투덜대며 오늘 그린 건 다 망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남편이 지나가며 "그런 날도 있지, 그냥 날씨 같은 거라고 생각해."라고 하더라고요.
그렇죠, 망한 날씨란 없고 맑은 날 흐린 날이 있다가 오늘처럼 비 오는 날이 있는 거겠죠.
다르게 생각해 보면 어제 그림 그린 것을 후회하나, 그건 또 아니더라고요.
어쩌다 보니 잘 안 그려졌고 결과야 그렇지만 그림 그린 선택에는 후회가 없습니다.
오늘도 문장들을 많이 읽고, 뭔가를 만들어보려 했지만 잘되지 않았다,라는 저의 일기를 다시 써봅니다.
오늘의 글은 참 뒤죽박죽입니다. 그래도 뭔가를 써봅니다. 이것은 연애편지가 아니니까... 망한 편지도 없지 않나 하면서요.
벌러덩 눕지 않고 유혹에 빠지지 않고 어느 날의 날씨 같은 글을, 아마도 또 미간에 주름을 잡고 오리 입을 하며 집중했을 저를 조금이나마 어여삐 여겨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