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일 동안 그림을 그렸습니다.
(부득이한 하루를 빼놓고)
처음부터, 100일 동안 해야지- 한 건 아니었는데 계속하다 보니 꾸준히 해보겠다는 엉성한 마음이 매일의 다짐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빠짐없이 이어가다 보니 중간에 그만두거나 하는 것이 아깝게 느껴지고요.
그러다가 언제가 100일이지, 궁금해져 날짜를 헤아려 보니 7월 12일인 걸 알게 되었고, 그 날짜에 '그림 100일'이라고 표시해 두었습니다.
이것은 순전히 완전히 나만의 조촐한 기념일이지만, 그날을 알고 나니 그때까지 더 할 수 있을 약간의 힘이 생기더라고요.
그런데 정말 딱 100일 되던 그날 저녁, 저는 너-무 피곤하여 집안일을 하다가 말고 소파에 누워버렸습니다.
그냥 이대로 자고 싶다는 생각만 하면서도 잠들지는 못했는데요.
정해진 날에 버려야 하는 일주일 치의 분리수거, 옥수수를 다듬다 말고 널브려둔 신문지와 비닐들, 그리고 친구네 밭에서 따온 작물에서 나온 반가운(?) 달팽이가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달팽이 이야기를 하자면, 그럴 때가 종종 있었어요.
그러니까 싱싱한 작물들을 씻다가 발견하게 되는 이 귀여운 생명체들을 만날 때마다 귀엽다 하고, 식구들은 집에서는 못 산다 화단에 놔주어야 한다 말했지만 저는 그 말을 듣지 않고 조금 더 보겠다고 까불다가 기르는 법도 모른 채 베란다에 두었다가는 밤새 홀랑 까먹고, 다음 날 가보니 바짝 말라 있었던... 그렇게 보낸 달팽이와 애벌레들을 식물 화분에 묻은 일들. 그 무책임함에 미안했던 일들이요.
이번에는 진짜 진짜 그러지 않기로 했거든요.
그렇게 몇 분을 누워 있다 일어나 축 처진 어깨로 반쯤 감은 눈으로 다듬은 옥수수를 정리해 냉장고에 넣어 놓고, 밖에 나가 분리수거를 하고, 집에 다시 올라와 깻잎 위에 있던 달팽이를 데리고 나왔습니다.
설거지를 하는 중에 더듬이는 나와 있으면서도 좀 전에 볼 때와는 너무도 다르게 가만히만 있길래 그 사이 죽었나 죽었나 몇 번을 살펴보았는데, 밖에 데리고 나오려고 보니 다시 부지런히 움직이더라고요.
달팽이도 밖으로 나간다는 걸 눈치챈 걸까요?
저는 안도하며 그 짧은 시간에도 약간의 정이 들었는지 괜히 아쉬워져 이 귀엽고 멋진 달팽이집을 사리살짝 쓰다듬으며 눈인사를 하고 조명의 환한 빛이 덜한, 차가 다니지 않는 화단을 찾아 달팽이를 놓아주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며 피곤하고 무겁고 졸린 상황에서도 미소가 나왔습니다.
어설프고 부족한 내 곁에서보다 풀밭에서 확실히 더 더 오래 살기를 바라면서요.
다시 돌아와 100일 이야기를 해보자면요,
해야 할 것들을 모두 해놓고 나니 이젠 정말 씻고 잠이나 잤으면 좋겠다 싶었습니다.
일단 미지근한 물에 샤워를 하고 나왔습니다.
씻기 전에는 그렇게 다 귀찮고 싫은데, 막상 씻고 있을 때나 씻고 나오면 이상하게 에너지가 차오를 때가 있어요.
물에 어떤 힘이 있는 것인지...
씻고 나오니 약간의 힘이 생겼는데 이대로 그냥 자버리면 참 아쉬울 것 같았습니다.
작업방에 불을 켜고 잠옷 바람으로 책상에 앉았습니다.
선을 긋습니다.
사람을 그립니다.
100일 동안 사람을 그렸습니다.
마지막 그림도 아닌데 뭔가 마무리의 기분이 들더라고요.
곰은 100일 동안 쑥과 마늘을 먹고 사람이 되었다지만, 저는 무엇이 되었을까요.
저는... 무엇이 되지 못했고, 100일을 했다고 엄청나게 실력이 올라가지도 않았어요.
주저와 실망과 좌절을 더 많이 만났고요.
작은 감각이 어딘가에 쌓이고 있을 거라는 믿음과, 선이 좋아졌네 형태가 잡혔네 싶은 만족감은 아주 가끔 만났어요.
그래도 다 해놓고 나니 스스로 뿌듯했습니다.
백 일을 채웠다! 나 진심이었군, 싶었습니다.
100일을 꾸준히 할 수 있었던 이유는 힘주어 뭔가 대단한 것을 그리지 않아서였던 것 같아요.
하루에 한 명, 혹은 두 명, 혹은 세 명.
하루에 그린 사람들은 열 명이 채 안 될 것이에요.
그 시작의 마음에는 좀 잘 그리고 싶어서, 가 있었고요.
오늘 일어나 보니 입술의 감각이 다른 날과 살짝 달랐습니다.
입술포진이 또 올라올까 봐 겁이 나서 밥을 든든히 먹고 비타민을 챙겨 먹었습니다.
지금은 비가 오고요, 달팽이의 안부가 궁금하고요.
오늘은 뭐 아무 날도 아니겠지만 저의 기준으로는 그림 100일이 지난, '1일째의 날'입니다.
역시 아무 날도 아니지만 다시 시작하는 날이 될 수도 있지요.
이제 숫자에 사로잡힌 의무감에서 벗어나 조금 자유롭게 작업을 해보려고 해요.
사실 오늘은 어떤 이야기도 쓸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또 여기까지 왔네요.
봄을 지나 여름의 중간에서 만난 100일 후의 이야기.
요즘의 날씨만큼이나 오락가락했던, 오늘의 편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