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방 정리를 했습니다.
전시 끝난 지가 언제인데 작업방은 여전히도 엉망이었습니다.
책상과 서랍 위 쌓고 쌓고 쌓아놨던 종이 더미, 분류도 정리도 없이 나뒹구는 펜과 연필, 그대로 멈춘 듯한 그림 도구들, 바닥에 누워있는 이면지, 꽉 찬 쓰레기통... 누군가 내 방을 잡고 통째로 흔든 듯한 방 안은 내가 아는 물건과 도구들로 가득했지만 대체 어디서부터 정리를 해야 할지 답이 나오지 않고, 미루면 미루는 대로 더 지저분해져만 갔습니다.
손수 따뜻한 밥을 차려 먹으며 일상을 잘 지켜내는 듯하다가도 작업방을 보면 한숨이 나오는 것이.
자꾸 작업방 문을 닫는 것이.
스스로 작가라는 정체성을 지키고 싶어 하면서도 보는 이 보채는 이 없으니 나는 내내 나의 상태를 모른 척하고, 나의 작업을 자꾸만 나중으로 미루고.
고민과 생각만 쌓고 모으며 그렇게 마구마구 뒤섞이고 얽힌 나의 정신 상태, 내 머리와 마음속을 이미지화해 보면 그것이 곧 지금 내 방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겠죠.
그러다 이제 정말, 이렇게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마침 체력이 충분해서 팔을 걷어붙이고 하나하나 정리해 나갔습니다.
50리터 종량제봉투를 사다 놓고는 가정집에서 이 큰 종량제 봉투를 채우려면 며칠이 걸리겠구나 싶었는데, 버린다 버린다 했던 오래된 이불 두 개를 넣었더니 반쯤 차고 25리터 정도의 공간이 남았는데, 제 방 쓰레기로 단숨에 봉투는 옆으로 위로 빵빵해졌습니다.
버릴 것들을 버리고 물건의 자리만 잘 찾아주어도 이렇게 속이 편한 것을...
대책 없이 복잡하게 쌓기만 했던 제 역할의 한 부분을 덜어낸 것 같아 마음이 조금 후련해졌고, 덕분에 가지런해진 작업 방 책상 위에서 2주치 가량의 밀린 일기도 썼습니다.
...
이렇게 글을 쓰다가 이런 비슷한 이야기를 했지 싶어 지난 편지들을 다시 읽는데 역시나 재작년 가을에도, 작년 1월에도 이런 글을 썼더라고요.
특별할 것 없는 먼지 이야기, 재미없는 청소 이야기, 스스로에게 드는 답답함과 한심함을 청소와 정리로 극복했다는 심심한 결말.
이런 변함없는 이야기를 여러번 반복하는 저를 보며 나란 사람은 어찌 그리 잘 변하지 않는 걸까 싶어요.
사실 일상이란 이렇고 이런 것이 아닌가 싶으면서도 제 안에서 나오는 이야기는 한계가 있다는 걸 깨달아요.
그래도 조용히 흘러가는 일상의 일들을 조금 다르게 쓰고 싶었는데 예전과 비슷한 이야기가 되어버려 아쉬워졌습니다.
'잘라내기'한 글들은 뒤로 뒤로 옮겨두고, 이런 평범한 글도 고치고 다듬으며 몇 시간씩 잡고 있습니다. 뒷부분의 내용들은 많은 확률로 이 편지에 담기지 못하겠지요.
과감하게 오늘의 글을 다 지우지는 못하다가, 괜스레 '무렵'이라는 단어를 써보고 싶어졌어요.
요즘 박준 시인의 시집을 틈틈이 읽는데 '섣부름' '웃자람' '무렵'같은 단어들에 대해 생각해 보았거든요.
뜻이 아니라 쓰임에 대해서요.
나와 같은 시간을 살고 있는 시인의 시 속에서, 저는 평소 잘 쓰지 않는 그런 단어들은 하나도 어색하지 않고 어긋남 없이 쏙 들어맞는 게 참 멋있고 근사하게 느껴졌어요. 곱씹게 되었어요.
단어를 얼마나 많이 고르고 골라야, 얼마나 많이 읽고 써야 자리에 꼭 맞는 단어들을 자연스레 쓸 수 있을까요.
무렵이라는 단어를 쓱 가져와 저에게 써봅니다.
무렵이란 의존명사이니 나 또한 무언가에 의존하고 무언가가 필요한, 무렵 자체를 닮은 '무렵 인간'이 아닌가 싶고요.
무렵은 무렵 하나로는 쓰일 수가 없어요.
대략 어떤 시기가 앞에 나와야 하죠.
동틀 무렵, 오후 네 시 무렵,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메밀꽃 필 무렵처럼요.
무렵의 뜻이란 어떤 시기의 그 즈음.
무렵 앞에 뭔지 모를 무언가가 피어나고 일어날 것 같은 모락모락 기운이 있는데, 이번 한 주는 제게 그런 시기였어요.
정리와 청소는 꼭 필요했던 준비과정이자 마음가짐.
이 무렵의 시기를 지나면서 멀끔해진 작은 작업방에서 웅크린 나는 조금 펴지고 그러니까 이곳에서 내 안에서, 무언가 모락모락 피어나고 일어나리라 저는 저를 믿어봅니다. |